바닷가재를 먹기는 좋아하는데, 아직 바닷가재를 직접 요리해보지 않았다면 하지 말라고 충고 한다.
바닷가재를 끓는 물 속에 던져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생물이 산 채로 삶아져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바닷가재가 과연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는 아직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았다. 그러나 바닷가재가 냄비에서 나오려고 냄비를 두들기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바닷가재를 먹을 때 마다 그 소리가 머릿속에서 자동 재생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기사는 맛있는 갑각류인 바닷가재를 먹지 말라는 캠페인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스위스는 오랜 역사 동안 지켜온 중립주의를 내던지고 바닷가재 편에 섰다. 그렇다면 과연 바닷가재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여부를 증거를 통해 알아봐야 할 것이다.
올 3월부터 스위스에서는 바닷가재를 산 채로 삶는 것이 동물 보호법 위반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앞으로 스위스인들은 바닷가재를 반드시 기절시키거나 죽인 다음 삶아야 하며, 살아 있는 바닷가재를 얼음 위에 보관하는 것도 안 된다. 스위스 정부가 어쩌다가 이런 발상을 해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과학 연구 결과를 통해, 바닷가재도 고통을 느끼므로 산 채로 삶는 것은 윤리적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통은 현상학적이라는 것이 문제다. ‘현상학적’이라는 멋진 철학 용어를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누군가가 체험을 함으로서 성립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가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고통은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 나 외에 다른 어떤 사람도 내가 고통을 느끼는지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다면 실재하는 것이다. 고통도 이와 마찬가지다.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사람이나 생물들이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나의 고통에 그들이 직접 동참해 볼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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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과학자들에게 진퇴양난이었다. 바닷가재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의 여부는 현대의 과학기술로도 검증이 불가능하다. 인간이 바닷가재의 감각을 느껴 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여러 포유류와 척추동물들은 인간과 유사한 습성을 보이고, 인간과 유사한 신경계가 있다. 따라서 그들도 고통을 느낀다고 확언할 수 있다. 개의 경우 다치면 비명을 지르고, 상처를 핥고, 상처를 입힌 물건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초파리는 다쳐도 이러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초파리도 뾰족한 물체나 뜨거운 열 등 특정 자극을 피하려고는 하지만 상처를 입어도 치료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즉, 자신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를 적어도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전파하지 않는 것이다.
바닷가재를 사랑하는 분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갑각류 역시 고통의 징후를 나타낸다.
게는 집게발을 잘리면 환부를 스스로 치료하려는 것 같은 동작을 하며, 전기 충격을 받으면 스트레스를 느낀다. 바닷가재의 더듬이에 약산성 물질을 바르면 환부를 완화 시키기라도 하는 듯이 더듬이를 뒤로 튕긴다. 그리고 게와 바닷가재 모두 뜨거운 물을 피한다.
그러나 움직임만 갖고서는 확언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감정을 동물에게 투사하는 습성이 있다. 특히 인간이 스스로 동물들에게 한 일 때문에 기분이 나쁘면 그렇다. 개를 사용한 어떤 유명한 실험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 실험에서 개가 뭔가 잘못을 했을 때 나타내는 표현을 하는 것은 개 주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개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개들은 아무 잘못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으면 주인에게 아첨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같은 행위를 바닷가재에게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본다면?
바닷가재의 두뇌는 딱 곤충의 두뇌 수준이다. 바닷가재의 뉴런 수는 10만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두뇌를 가진 것도 아니다. 이들은 전신에 신경절을 지니고 있다. 신경절은 두뇌보다 작고 조직도가 떨어지며 더 적은 수의 뉴런으로 구성된 기관이다. 정신적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바닷가재와 게의 수준은 곤충과 똑같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파리도 갑각류와 마찬가지로 불쾌한 자극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본능에 불과하다. 이들이 뾰족한 물체를 피해가는 건 애벌레가 성장해 번데기가 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복잡한 동작이지만 생각을 하지 않고도 저절로 되는 것이다.
분명 곤충의 회피 동작은 순전히 본능적인 것이다. 어느 말벌 전문가가 워싱턴 포스트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메뚜기는 생존을 위한 다양한 반응 동작을 보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메뚜기는 사마귀에게 배를 물어뜯길 때에도, 음식을 주면 먹는다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동물이 자기 내장이 먹히는데도 태연하게 식사를 한다면 납득하기 어렵다.
끓는 물에 바닷가재를 담갔을 때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사작용을 보인다. 꼬리가 홱 움직이는 것은 여기서 빠져나가려는 시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갑자기 자극을 받았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또한 일부 연구자들은 바닷가재가 뜨거운 온도를 피하려는 것은, 차가운 물이 생존에 더욱 적합하기 때문에 나온 생존 기제일 뿐일 수도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갑각류가 곤충보다 더욱 복잡한 생물이라는 점도 익히 알려진 바다. 이들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려는 듯한 동작을 보인다는 것이 그 증거 중 하나다. 그리고 단일한 두뇌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볼 수는 없다. 문어의 경우 발마다 작은 뇌가 달려 있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은 문어가 매우 지능이 높으며,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증명했다.
즉, 이는 복잡한 문제다. 분명 바닷가재의 뉴런은 뜨거운 것과 날카로운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닷가재가 이들을 자극으로 인식하느냐는 또 별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분산형 뇌를 지닌 생물이라고 해서 고통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한 인간은 바닷가재와 의사소통이 안 되므로 지금의 느낌을 물어볼 수도, 대답을 들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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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갑각류가 단일한 두뇌가 없다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는 볼 수 없다. 때문에 산 채로 끓는 물에 넣는 방식이 고통 없이 갑각류를 죽이는 방식이라고 속단할 수 없는 것이다. 척추동물 등의 고등생물을 가장 고통 없이 죽이는 방식은 척수를 절단하는 것이다. 이 경우 즉사한다.
개구리나 쥐 같은 실험동물들을 뇌간(뇌 자체는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을 날카로운 물질로 찔러 안락사시키는 것이야말로 비교적 인도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바닷가재는 뇌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신경절이 존재한다. 따라서 어디를 타격해야 감각을 마비시킬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큰 돌로 때려죽이면 확실하고 안락하게 즉사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방법은 고상하지 않다. 게다가 바닷가재 고기 중 상당부분을 먹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왜 바닷가재를 죽이는지 생각해 본다면 별로 현명치 못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윤리와 바닷가재 고기를 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이럴 경우 냉동시키는 것이 답일 수도 있다. 갑각류나 곤충 같은 냉혈동물들은 냉장고나 얼음물 속에 넣으면 몸이 마비된다. 그리고 이들이 해저에서도 생활하는 것을 볼 때, 냉기에 반응하는 통증 수용체는 없는 것 같다. 물론 끓는 물에 넣으면 가열된다.
그러나 이 온도 전환은 매우 빠르게 일어나기 때문에 바닷가재가 몸을 요동칠 시간이 비교적 적다. 물론 이런 방법을 쓴다고 해서 이들이 느끼는 감각이 변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무엇보다 인간들은 바닷가재의 고통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그저 먹는 사람의 양심의 가책을 더는 정도의 도움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바닷가재에게 좀 더 존엄한 죽음을 선사할 수는 있다.
물론 바닷가재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분명히 입증되어도, 그렇다고 바닷가재 식용을 막아야 할지는 불확실하다. 소는 도살당할 때 고통을 느낀다.
또한 소는 동류간에 우정을 느낄 정도로 감정이 풍부한 고등생물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여전히 소고기를 먹는다. 인간들이 스스로의 감수성을 지키기 위해 동물들의 고통을 전력을 기울여 무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닭 같은 동물보다는 바닷가재를 자신의 주방에서 더 쉽게 죽일 수 있다. 그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정말로 불편한 윤리적 문제다.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편집부 / BY SARA CHODO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