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미래당 손학규 신임 당대표는 26년간의 정치 여정에서 여와 야, 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경기지사, 장관, 국회의원을 두루 경험한 ‘경륜’의 정치인이다.
|
민자당, 한나라당,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민주당, 국민의당, 바른미래당까지 여러 정당에 몸담았던 그는 현 더불어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두 차례 대표를 역임했다.
이 때문에 손 대표는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는 동시에 ‘보수 정당의 소장 개혁파’, ‘진보 정당의 합리적 민주주의자’로 불려왔다.
1947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난 손 대표는 1970년대 서울대 재학 중 반유신 독재 투쟁을 했던 재야 운동권 출신으로, 유신 체제 종식 후 영국 유학길에 올라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인하대와 서강대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를 정계로 이끈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정치개혁 의지를 천명한 김 전 대통령의 발탁으로 경기 광명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민자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뒤 광명에서 내리 3선을 했고, 김영삼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2년 6월 경기지사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돼 일약 대권 주자 반열에 올랐다.
경기지사 4년 임기를 마치고 대권 도전을 모색하며 이명박·박근혜 후보와 3각 경쟁을 벌이던 중 2007년 3월 대선후보 경선 방식을 놓고 한나라당의 한계를 지적하며 탈당했다. 이후 진보진영인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당적을 옮겨 대권 레이스에 합류했으나 당내 경선에서 정동영 최고위원에게 패했다.
2008년 초 대선 참패로 허덕이던 당에 구원투수로 투입돼 과도기 대표로서 총선을 진두지휘하며 ‘정치 1번지’ 서울 종로에 출마했나, 한나라당 박진 후보에게 패해 당적 변경 후 연패의 아픔을 맛봤다.
이후 강원도 춘천에서 2년간 칩거한 손 대표는 2010년 지방선거 패배로 위기에 빠진 민주당의 당대표로 선출, ‘2기 손학규 체제’를 출범시키며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이듬해인 2011년 4월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의 텃밭인 경기도 분당을에 출마해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를 꺾으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당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급부상과 ‘안풍’(安風·안철수 바람)의 위력에 밀려 대선후보로서의 존재감은 미약했고, 이에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둔 2011년 말 옛 민주당과 시민통합당의 야권 통합을 이루며 민주통합당을 출범시키는 승부수를 던졌다.
나아가 그해 연말에는 대선 출마를 염두에 두고 2012년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2012년 9월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에 밀려 2위에 그치며 또다시 대권 도전의 꿈을 접어야 했다. 다만 이때 손 대표가 내세운 ‘저녁이 있는 삶’ 구호는 큰 호응을 얻었다.
이후 독일로 출국, 8개월여간 연수 생활을 한 손 대표는 2014년 7월 경기 수원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정치적 재기를 노렸다. 하지만 또다시 고배를 마셔야 했고, 결국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전남 강진 백련사 뒷산 토굴에 둥지를 틀고 2년여 칩거한 그는 ‘제7공화국’ 깃발을 내걸고 2016년 10월 정계에 복귀했고, 동시에 더불어민주당을 탈당, 안철수 전 의원이 내민 손을 잡아 국민의당에 합류했다.
그렇지만 2017년 국민의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안 전 의원에게 패배, 대권 삼수에는 실패했다.
지난해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에 찬성했던 그는 바른미래당 창당 후 정치 2선에 물러나 있다가 올해 6월 지방선거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컴백했고, 이번 전당대회에 출마했다.
한편, 올해 71세의 나이로 ‘올드보이’라는 비판이 집중됐음에도 손 대표가 당선된 것은 당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당원들이 세대교체보다 안정되고 검증된 리더십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손 대표는 향후 20대 총선을 앞두고 야권 통합에 역할을 하겠다며, 자신의 ‘통합 전문가’ 이력을 내세웠다.
/최주리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