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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는 독립운동가 중 남북한 모두에게 인정받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홍범도를 단편적으로만 기억한다. 이를테면 봉오동전투의 홍범도만을 기억한다. 이처럼 홍범도의 한순간만을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시험에 대비해 요약식으로 배우거나 아니면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으로 그를 접한 영향은 아닐까. 마치 명성황후를 드라마에서 연기한 최명길 혹은 이미연 같은 여배우로 기억하거나 김좌진을 청산리전투 혹은 ‘장군의 아들’의 아버지로 기억하는 것과 같다.
남북한에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체제와 분단 이후 쌓여 있는 시간의 켜를 걷어낼 수 있는 그 무엇이 그의 삶에 있기 때문이다. 홍범도는 태어난 직후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 역시 일찍 돌아가셨다. 홍범도는 친척 집에 맡겨졌다가 당시 많은 이들처럼 어느 집에 의탁해 생계를 이어갔다. 흔히 이야기하는 ‘머슴’이었다. 그는 머슴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신분을 뛰어넘어 전 계층을 포괄하는 민족해방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독립운동은 절대 낭만적이지 않다. 독립운동은 본인뿐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까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험난한 길이었다. 일제는 홍범도의 가족을 볼모로 잡고 투항을 종용했고 홍범도가 이를 거부하자 그들을 죽였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가 처음부터 숭고한 뜻을 품었거나 혹은 영웅의 기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는 지극히 평범한 아무개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시험에 대비해 요약하듯 ‘봉오동의 홍범도’ 식으로 그를 접했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사 교육이 그리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역사의 편린만을 전달하기보다는 그 시대와 거기서 살고 있던 이들을 통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홍범도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은 사실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 중 한 명으로 수렴한다면 남북한에서 그를 인정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도 잘 살펴보면 그와 관련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얼마 전 많은 학생들이 치른 2019년도 대입 수학능력시험의 한국사 문제에서도 홍범도가 살았던 시대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그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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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문제 중에 조선이 개항하기 이전의 시대적 상황을 물어보는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시간순으로 연관된 네 개의 장면을 제시하고 그중 한 칸을 비워 채우는 것이었다. 첫 장면은 ‘병인박해’이고 두 번째는 ‘병인양요’, 네 번째 장면은 ‘척화비’였다. 병인양요와 척화비 사이에 넣을 수 있는 적절한 사건을 찾는 것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문제에는 ‘서구 열강의 침략과 조선의 대응’이라고 친절하게 상황까지 설명을 곁들였다) 알고 있다면 그 빈칸에 들어갈 수 있는 적절한 사건이 신미양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시대를 살고 있던 홍범도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 요즘은 이와 관련해서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션사인’을 언급 안 할 수 없다. 고증의 문제는 추후 이야기하고 주인공 중 한 명인 최유진(이병헌 분)은 신미양요 때 미군함을 타고 조선을 떠났다. 이후 그는 ‘유진 초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떠날 당시 그는 조선의 신분질서에 억울하게 죽은 노비의 자식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미국 영사대리 신분의 미군 대위였다.
머슴 홍범도는 1868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드라마에서 미군함은 최유진에게 구원과도 같았지만 홍범도가 태어나고 자란 평양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병인양요와 함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직접 경험한 평양 사람들에게 신미양요 당시 미군함은 드라마에서 최유진이 바라보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에 미국 국적의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일대에서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다 결국 평양 관민의 공격을 받아 배는 침몰하고 선원은 처형된 사건이다. 당시 평양 관민이 제너럴셔먼호를 공격한 것은 제너럴셔먼호에 의해 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었기 때문이었다.
일설에는 홍범도의 할아버지도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죽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사실 유무를 떠나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은 분명하다. 특히 신미양요 때 미국은 보복을 이유로 강화도를 공격했기 때문에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평양에 미군이 다시 함대를 이끌고 와 보복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우려했다. 실제 홍범도가 태어나던 해에도 미군함이 제너럴셔먼호의 생존자를 수색한다는 이유로 대동강 하류에 오기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우려를 일부의 기우로 치부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력을 앞세운 열강의 통상 요구는 조선의 많은 사람들에게 왜구의 침략과 다를 바 없었다. 이것은 홍범도의 어린 시절 경험을 잘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척화비는 외세의 침략에 대한 경고와도 같았고 어린 홍범도 역시 척화비가 세워지는 과정을 직접 경험하면서 비록 척화비에 쓰인 글을 읽을 수는 없었다 해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머슴으로 생활하던 홍범도는 1884년 자원해 군대에 들어갔다. 홍범도는 회고에서 군대에 들어가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두 살을 올려 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그가 들어간 군대는 ‘친군서영’이라 불리는 평양감영군이었다. 미스터션샤인에서 미국에 도착한 최유진이 군대에 들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홍범도의 삶에서도 군 생활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홍범도가 나이를 속이고 들어간 평양감영군은 이후 서울의 중앙군에 버금가는 친군서영으로 발전했다. 여기에는 조선의 개항과 임오군란과 같은 시대적 상황이 중요한 작용을 했다. 1876년 조선은 결국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강요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개항했다. 이후 조선은 ‘부국강병’을 위해 신식 군대를 창설하고 이들을 훈련시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군에게 훈련을 받아 ‘왜별기’라 불리는 신식 군대와 구식 군대를 차별했고 결국 1882년 임오군란으로 이어졌다.
임오군란 과정에서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의 내정까지 간섭했다. 서울의 치안을 위한 중앙군(이후 친군영)은 청군에게 지휘와 훈련을 받아 이전 왜별기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평양감영군은 고종의 군사적 기반이 될 수 있었다. 평양감영군을 친군영처럼 조직하고 훈련시킨 것은 민응식이었는데 그는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도운 측근이었다. 그래서 고종은 그가 지휘하던 평양감영군을 친군영의 외영으로 삼고 직접 관할해 서울에서 훈련하도록 했다. 이후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평양감영군은 친군서영으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서울에서 왕세자가 훈련을 직접 주관하면서 사실상 고종의 친위대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상황은 국왕조차 안위를 위해 측근을 이용, 기반 마련에 고심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홍범도와 같은 민초의 억울함은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었고 누군가 풀어줄 수도 없었다. 미스터션샤인에서 또 다른 주인공이던 김희성(변요한 분)이 발행한 호외에서 ‘일본군의 총탄이 무고한 조선인 6인을 폭도로 몰아 무참히 살해했다. 대한의 법까지 손아귀에 넣으니 그들의 짐승 같은 횡포가 그치질 않는다’라고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희성은 ‘이천만 동포여 두렵고 두려우나 마땅히 나아가자! 천둥으로! 폭풍으로!’라고 외쳤고 홍범도 역시 비록 임진왜란 때부터 쓰던 조총이지만 일제와 싸우기 위해서 기꺼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쎄 말이다. 그렇다고 돌아서겠느냐 … 화려한 날들만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질 것도 알고, 이런 무기로 오래 못 버틸 것도 알지만 우린 싸워야지. 싸워서 알려줘야지 우리가 여기 있었고 두려웠으나 끝까지 싸웠다고.”
미스터션샤인에서 어느 의병대장이 수많은 일본군을 보고 두려워하는 의병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다.
많은 이들이 미스터션샤인을 보고 한말 의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 드라마에서 의병 홍범도는 언급조차 되지 않지만 나는 왜 그가 자꾸 떠오르는 것일까. 미스터션샤인을 이야기하는 김에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홍범도는 의병 활동 당시 별다른 직위나 호칭을 쓰지 않았다. 그저 아무개처럼 홍범도 의병이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도 어느 포수가 의병을 아무개라 하였다.
“듣고 잊어라.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아직까지 수많은 의병이 홍범도 의병처럼 아무개로 남아 있다. 그러나 1910년 국권을 상실하면서 그들은 사라지고 일제가 남긴 ‘비도’ 혹은 ‘폭도’라는 글자만 남았다. 지금 우리는 나라는 되찾았지만 그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결국 남는 것은 일제가 남긴 ‘폭도’라는 기록뿐일 것이다. 잊혀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실제 우리는 어느 순간 홍범도를 봉오동으로만 기억하고 함경도에서 의병투쟁하던 의병 홍범도는 잊혀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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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