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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옛 남일당 터에 주상복합 건물이 층수를 높여가는 동안 살아남은 자들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별안간 생활터전을 잃은 이들이 내몰린 곳은 결국 생존을 위한 전장. 용산참사 10주기(1월20일)를 맞아 서울경제신문은 남일당 건물에 끝까지 남았던 철거민 2가구와 만나 그들의 지난 10년을 들어봤다. 이들은 용산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다. 남편 고(故) 이상림씨의 부인 전재숙(75)씨와 고(故) 양회성씨의 부인 김영덕(64)씨가 그들이다. 전씨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부근에서 도시락가게를 운영한다. 김영덕씨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 주상복합 건물 건설현장인 용산참사 현장 앞에서 호떡 장사를 한다. 다음은 전재숙씨와의 일문일답.
- 용산참사와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으신지
“그 지역에서 30년 가까이, 26년을 한집에서만 살았다. 개발이 된다고 했잖아요. 도로 그 자리에 들어가서 장사를 하는 건지 알았어요. 개발되면 좋죠. 새집에 들어오고. 근데 그게 아니고 나가라는 거죠. 있는 사람이야 나가라면 바로 나가면 좋지만 없는 사람들은 뭐가 있어야지. 사글세라도 얻을 돈이 있어야 나가지 않겠어요?”
- 당시 어떤 일을 하셨나요?
“레아호프 했어요. 한강갈비 23년 동안 하다가 호프집으로. 장사가 어마어마하게 잘됐어요. 근데 개발이 된다고 나가라고 하잖아요. 용역들이 진짜 쇠파이프 끌고 오고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아니 그거보다 더 심했지.”
- 망루에 올라가게 된 배경은요?
“ 굉장히 급하게 돌아갔어요. 오세훈이 한강 르네상스 한다면서 다른 데는 몇 년씩 걸리는데 용산은 일 년도 안 걸렸던 것 같아요. 용역들이 들어와서 내쫓고 근데 우리는 그게 뭔지도 몰랐지. 개발 지역에 살아 봤어야 알지. 우리 얘길 구청에도 가서 해보고 시청에도 가서 얘기해보고 조합에도 얘기해보고 아무 데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어요. 오죽했으면 망루를 올라갔겠어요. 24시간도 안 돼서 공권력 투입했잖아. 김석기 내정된 지 하루 만에 공권력 투입했어요. 355일 동안 영안실에서 싸웠어요. 돌아다니면서 외쳤어요. 무조건 잡아갔어요. 대화가 하고 싶어서 올라간 건데. 거기 올라가면 대화가 다 돼서 내려오는 건 줄 알았어요. 근데 도심에서 테러를 일으켰다고. 우리가 무슨 테러를 일으켰겠어요.”
- 참사 이후에 어떻게 하셨는지요?
“우리 아들 이충연이가 처음엔 거기서 죽은 줄 알았어요. 병원에 가보니까 다 죽어있었어요. 중대병원에 있을 적에 그게 이제 정신을 되찾아 가지고 있는데 경찰들이 다섯 사람씩 와서 지켰어요. 도망갈까 봐. 다리가 부러지고 인대가 늘어났는데 어떻게 도망을 가겠어요. 몸 좀 나아지니 바로 잡아가서 구속됐죠. 355일 동안 싸워서 장례를 모셔놓고… 그다음에 구속된 동지들을 쫓아다니면서 지냈죠. 검찰이 작성한 조서 3,000쪽을 가지고 내놓지 않았어요. 1만 쪽 중 3,000쪽을 다시 내놓지 않았어요. 정정당당한 재판을 받기 위해 3,000쪽 내 놔라 하고 돌아다녔어요. 1심은 3,000쪽을 못 받고 끝났지. 2심에서는 일부 받았어요. 아직도 못 받은 것도 있고.”
- 당시 심정은 어떠셨어요?
“그 사람들 석방될 때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우리는 다 2009년 1월 20일 그날 딱 멈춰있는 거에요. 그동안 산 건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요. 기억이 안 나.”
- 생계는 어떻게 이어가셨어요?
“이명박이가 4년 조금 못되니까 사면 결정을 받고 석방됐죠. 나와 보니까 먹고 살길이 없잖아요. 빚이라도 내서 뭐라도 시작을 해야죠. 먹고 살아야 싸우잖아요.”
- 지금 운영 중인 가계를 시작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한 오 년 정도 됐죠. 가게 하면서 나가서 남들도 도와줬어요.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으니까 나도 나가서 힘든 사람들 도와줘야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누가 날 도와주겠어요. 먹고 살면서 싸워야지. 우리는 꼭 용산 같은 일이 재개발로 벌어지지 않아야죠.”
- 17일 집회에서의 심정을 이야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오늘 집회하는데 찾아가서 앞을 보는데 마음을 어디다 둘 수가 없더라고요. 정부를 바꿀 때도 그 추울 때 손이 얼어 터져 가면서 촛불을 들고 찾아가서 바꿨어요. 그렇게 바꿨는데 쫓겨나는 사람들은 더 많은 거 같아. 그 사람들 갈 데가 없잖아요. 다시는 용산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도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벼랑 끝으로 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데. 아현동이 얼마나 힘들었으면…어디로 가겠어요.”
- 많이 힘들었을텐데 어떻게 이겨내셨는지요?
“힘없는 사람은 뭉쳐야지. 힘든 데 찾아다니면서 위로도 받고, 또 위로도 주고. 이겨내는 방법은 없죠. 당당하게 서는 것밖에.”
- 아드님이 구속돼 있을 때 생활이 어렵진 않으셨나요?
“(남편) 장례 모시고서는 먹는 건 생각할 시간도 없었어요. 아들이 구속되어 있으니까. 하루에 한 끼 먹으면 다행이었죠. 온종일 굶을 때도 있고요. 아침 일찍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는데요. 매일 길거리에서 살았어요. 아들 보고 싶으니까 바깥에 가서 사는 거죠.”
- 아직 강제이주 문제가 없어지지 않았는데 어떤 식으로 개선돼야 할지요?
“동절기에 내모는 건 없어져야지. 내몰아야 죽는 것밖에 안 되지. 집 걱정 없는 세상을 꼭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우리가 법안도 많이 발의했어. 다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거야. 우리를 찾아와서 손잡은 국회의원은 한나라당 말고는 수백 명 일걸? 근데 그 사람들은 지금 뭐하나. 국회의원 10명 서명만 받으면 되는데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데. 함께 싸워서 이겨내는 수밖에.”
- 아드님 나오시고는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요?
“아들이 석방되고 나서는 기반이 안 잡혀있으니까 어렵고 힘들었죠. 고통이 많이 있었지. 생활터전을 잃었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직접 주방에서 일해서 뛰었지. 장사도 안되는 집을 세 조금 내고 들어갔거든. 인건비를 줄어야 했지. 몇 년 하다 보니까 지금은 밥은 먹고 살죠. 지금 생활? 나는 매일 가게에 나오지. 뭐 이게 생활이지.”
다음은 김영덕씨와의 일문일답.
- 요즘 우리 사회 어떻게 보는지요?
“잘사는 사람만 잘사는 대한민국 잘못됐어요. 상층 아니면 영세민, 우리나라 중층이 없어져 버린 것 같아요.”
- 그동안 서울시에서 보상해준 게 있나요?
“보상이 뭐가있냐. 보상 못 받았다.”
- 지난 10년간 어떻게 지냈나요?
“원래 여의도에서 초밥집을 운영했는데 주인이 건물 팔아서 옆 건물로 이사 갔어요. 그즈음 작은 아들 어깨수술로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잘 안 되면서 호주 유학보내고 이후 IMF 터지면서 용산으로 이사오게 됐죠. 용산에서 복어랑 아귀 요리해서 팔게 됐죠. 이후 알고 있는 대로 (용산참사가 났고) 그렇게 됐죠.”
- 지금 호떡 장사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게 됐나요?
“(용산참사 이후) 장례 치르고 1년 정도 멍 때리고 있으니까 아들들이 ‘장사 한번 해보자. 우울증 생겨서 안 된다. 활동하고 그런 것이 낫지 안 그러면 큰일난다’고 해서 숙대 입구에 일식 주점 장사를 8년 했죠. 주변에 나이트클럽도 있어서 잘 되다가 나이트클럽 망하니 가게도 잘 안됐어요. 장사 접고 파출부 하려다가 주위 사람이 ‘형님 자존심 상해서 안 된다 장사라도 하라’고 해서 호떡 장사를 하고 있어요.”
- 일식 주점이 잘 안됐을 때 어떻게 버티셨나요?
“대출도 받고 카드깡도 하고 그랬죠.”
- 아들들은 뭐하나요?
“큰 아들은 일식집 하다가 나처럼 성남에서 호떡 장사 하고 있어요. 작은 아들은 야구선수 하려다가 잘 안 돼서 취업했죠.”
- 남편 생전에 가게 운영은 어땠나요?
“전에는 잘 살았다. 남편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사촌이 일식집을 운영했는데 사촌한테 일식을 배웠어요. 잘 됐죠. 남편이 살아있었으면 이렇게 살진 않았을 거에요.”
- 보상도 못받고 비참한데 이렇게 열심히 장사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살아야 하니까. 억울해서 못 죽어요. 진상 다 밝히고 죽어야죠. 오죽하면 내가 사고난 데 앞에서 장사하겠어요. 내 남편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내가 힘을 내서 싸워야 하니까 비참해도 장사 하는 거죠.”
- 비참하다고 했는데 뭐가 비참한가요?
“단속반 나와서 단속할 때 제일 비참해요. 단속반 나오면 장사 접고 골목길로 피해야 할 때 죽고싶을 만큼 비참했죠. 다른 장사들은 가만히 놔두는데 나는 이렇게 단속당하나 싶어서요.”
- 호떡장사 한지는 얼마나 됐나요?
“호떡장사 한 지는 3개월 정도 됐어요. 용산참사 당한 다른 유족한테 기술을 배웠죠.”
- 요즘에도 단속반이 나오나.
“(노점상을) 오래 해봤으면 모르겠는데 처음 나와보니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단속반하고 싸워야 하는데 처음에 그게 두려죠. 처음엔 알았습니다, 해드릴게요 이러다가 오기가 생겼어요. (용산참사) 10주기가 돌아온다. 마음대로 해라. 난 먹고 살 데가 없어서 여기로 왔다고 말하고 내가 엄포를 놓았어요. 기자들 오니까 가만 안 있겠다고. 만약에 용산참사 10주년 지나고도 단속하러 또 오면 용산구청 찾아갈 것이다라고 말했죠. 그래서 요새는 단속 안 나오네요.”
- 호떡이 맛있다. 장사가 잘 되는 것 같네요?
“호떡은 찰옥수수로 만드는데 맛이 괜찮아요. 장사는 적을 때는 하루에 3만 원 어치 판매해요. 요즘에야 단속도 안 오니 장사가 잘 돼요.”
/서종갑기자 gap@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