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부터 삼성역까지 약 4㎞에 이르는 테헤란로 10차선 도로 양옆으로 들어서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대형 오피스빌딩들은 성장률을 나타내는 막대그래프를 연상케 한다.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기보다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높이 치솟기 위해 경쟁하는 듯한 모습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특징 없는 평범한 오피스지구로 보이지만 테헤란로는 한국 현대사가 응축된 욕망의 공간이다.
테헤란로를 비롯한 강남 개발이 본격화된 시기는 지난 1960~1970년대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급속한 도시화로 강북이 포화되면서 1966년에 ‘서울 도시기본계획’이 발표되고, 강남 개발은 서울시 인구분산정책에 따라 한강 이북 40%, 한강 이남 60%의 인구비율을 목표로 시작됐다. 이후 1969년 12월 제3한강대교(한남대교)가 완공되고 1970년 7월 경부고속도가 개통되면서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또 당시 박정희 정권이 강남 개발에 적극 나선 것은 대선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 테헤란로는 논밭이었다. 당시부터 테헤란로에 터를 잡고 살았던 원주민들 중 일부는 지금도 테헤란로 오피스 시장의 큰손으로 군림하고 있다. 대표적인 이가 가락건설 대표를 맡고 있는 김대중씨다. 그는 현재 강남역 한복판에 위치한 GT타워, GT대각빌딩 등 수천억원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 지난해 빌딩 임대료로 거둔 매출만 85억원에 달한다. 김씨처럼 부동산 업계를 주무르는 건물주가 된 이들 외에도 테헤란로가 개발되기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았던 원주민들 중에는 주로 예식장이나 주유소·골프연습장·자동차운전학원 등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한 경우도 많았다. 원주민 다음으로 테헤란로에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복부인들이다. 특히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기 전, 지하철 노선이 들어서기 전에 개발 소식을 듣고 땅을 사들인 정계 유력 인사나 고위관료들의 부인들이 많았다. 테헤란로에서 수십년째 기업과 자산가들의 건물 매매를 도와주고 있는 정성진 어반에셋매니지먼트 대표는 “복부인들의 경우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해외 도시 거주 경험이 많아 향후 부동산 가격이 오를 땅을 알고 있었다”며 “특히 테헤란로에 향후 지하철 노선이 들어설 것이라는 점도 아주 중요한 투자 이유였다”고 말했다.
실제 테헤란로를 관통하는 서울지하철 2호선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된 후인 1980년 10월부터 단계적으로 개통된다. 또 국가 산업 발전에 기여한 이들 중에서도 테헤란로에 위치한 땅을 보상으로 받은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1970년대 한국에 처음으로 반도체 장비를 들여온 김만진 박사다. 당시 김 박사는 미국 GE의 반도체 장비를 들여와 한국 반도체 산업의 토대를 쌓았으며, 현재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역사가 여기서부터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 박사는 당시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테헤란로 대로변 땅을 받았다. 김 박사가 받은 땅은 현재 르네상스호텔 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자리다. 당시만 해도 허허벌판이었으나 이후 테헤란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김 박사도 건물을 지어 인호IP빌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호는 김 박사 부친의 이름이며 IP는 인터넷프로토콜의 약자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세계 1위 메모리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에서 부를 쌓은 이학수 전 삼성전자 부회장도 선릉역 인근 L&B타워를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고로 L&B라는 빌딩명은 이 부회장의 성과 그의 부인 성을 딴 것이다. 테헤란로에 한국을 대표하는 반도체 산업을 뿌리내리고 키운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부터는 대기업들이 본격적으로 테헤란로 땅을 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당시 돈을 많이 벌었던 건설사들이 주로 땅을 사들였다. 성지건설이 대표적이다. 국내 최초로 오피스텔을 개발해 공급한 것으로 알려진 성지건설은 1990년대 테헤란로 대로변에 사들인 땅을 오피스텔로 개발해 분양했다. 지금도 테헤란로에 성지하이츠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이 여러 군데 남아 있다. 이어 1990년대 들어서는 신한종합금융·나라종합금융 등 종합금융사들이 테헤란로에 사옥을 짓기 위해 땅을 사들였으나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파산하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철골구조만 올라간 채로 20년 가까이 흉물로 방치돼 있다 지난해에 준공한 루첸타워도 신한종합금융이 사옥으로 짓던 건물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현대·한진·한솔·동부·포스코 등 많은 대기업도 테헤란로 땅을 사들이면서 막대한 자본이 테헤란로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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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에 다시 한번 큰 손바뀜이 일어난 시기는 IMF 외환위기다. 한국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IMF 외환위기는 우리가 사는 도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외국계 투자가들이 강남이나 도심 등에 위치한 대형 오피스빌딩에 본격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외국계 투자가들이 첫 깃발을 꽂은 곳이 바로 역삼역 8번 출구에 위치한 옛 현대중공업빌딩(현 SI타워)이다. 현대중공업이 서울 본사 빌딩을 짓기 위해 산 건물인데 95% 이상 준공된 상태에서 IMF가 터지면서 매물로 나오고 네덜란드계 투자회사인 로담코가 1999년 12월에 인수를 끝냈다. 당시 로담코 아시아투자담당 이사로 인수에 참여했던 남선우 켄달스퀘어 대표는 “여러 기록을 세운 상징적인 투자였다”며 “당시 테헤란로 오피스빌딩의 경우 소유주가 대부분 개인이었는데 보유세가 높고 대출이 잘 안 나오다 보니 자금을 모아 건물을 짓기 위해 전세구조였고 임대료라는 개념이 없었다. 로담코의 경우 재무적 관점에서 투자했기 때문에 처음으로 테헤란로에서 월세를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로담코의 현대중공업빌딩 이후 외국계 투자가들을 비롯한 기관투자가들이 재무적 투자 목적으로 테헤란로 빌딩들을 본격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하면서 테헤란로 오피스 시장에서도 월세가 보편화했다. 대기업과는 또 다른 성격의 자본이 테헤란로를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중공업빌딩 맞은편에 위치한 강남파이낸스센터도 현대그룹이 사옥으로 개발하다 IMF 외환위기로 자금난에 빠지면서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에 매각했으며, 지금은 싱가포르투자청(GIC)이 소유하고 있다. 또 고(故) 김수근 건축가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옛 르네상스호텔도 이지스자산운용이 미국계 사모펀드 KKR, 국민연금과 손잡고 투자해 현재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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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서는 학원 강사나 스타트업을 통해 돈을 번 젊은 사업가들이 테헤란로에 빌딩을 사들이는 것이 특징이다. 경제 흐름이 고스란히 반영된 현상이다. 빌딩중개 업계의 한 관계자는 “테헤란로 일대 빌딩을 사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낮아지고 있다”며 “갑작스럽게 큰돈을 번 사람들이 과시용으로 테헤란로 빌딩을 사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테헤란로는 강남 개발부터 IMF 외환위기, 벤처 열풍과 거품 붕괴 등 역사의 굴곡에 따라 부침은 있었지만 지난 반세기 동안 끊임없이 자본들이 몰려들면서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냈으며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공간이 됐다. 또 지금도 많은 자본이 몰리면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건축가 고(故) 정기용씨는 테헤란로를 두고 ‘독점자본의 외딴섬’이라고 표현했지만 최근에는 테헤란로를 향한 욕망이 점점 주변부로까지 확산되고 있다.국내 최대 부동산개발회사인 MDM과 국내 1위 부동산자산운용사인 이지스자산운용이 손잡고 개발 중인 서초동 서리풀 인근 옛 정보사 부지 개발 프로젝트와 삼성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대차그룹의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이 두 프로젝트는 현재 통상적으로 테헤란로라고 부르는 경계를 넘어서 진행되는 개발사업이다. 강남역과 삼성역을 넘어 점점 더 확장되고 있는 테헤란로를 향한 자본의 욕망이 우리가 사는 도시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 같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