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런던 킹스크로스 지역 |
|
버려진 산업유산, 새로운 런던의 상징으로
‘킹스크로스(King’s Cross)‘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대표하는 교통과 물류, 산업의 중심지로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기존의 핵심 기능들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에는 런던 중심부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 됐다. 사람들의 발길은 뜸해졌고 버려진 건물들은 낡고 낙후되면서 저소득 인구가 밀집된 슬럼가라는 이미지가 굳어졌다. 19세기 이후 상업시설도 거의 변화가 없었으며, 1980년대에는 런던 오피스 지구에서 임대료가 가장 낮은 지역이었다.
그랬던 킹스크로스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다. 1996년 고속철도로 유럽대륙을 연결하는 세인트판크라스역에 런던&콘티넨털(LCR) 종착역이 들어서는 것이 확정되면서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2001년에 킹스크로스 개발을 위한 파트너십이 체결됐으며, 전체 지분의 50%를 보유한 민간 디벨로퍼 아젠트(Argent)와 LCR(36.5%), 13.5%의 지분을 가진 물류회사 DHL(舊 Exel)로 구성된 KCCLP(King’s Cross Central Limited Partnership)이 주체가 되어 개발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후 중앙정부·지방정부·민간 디벨로퍼·시민 등이 350여차례의 회의를 통해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2006년 마침내 최종 승인을 받아 2007년부터 건설이 시작됐다. 2013년에는 구글이 영국 본사를 킹스크로스로 이전한다고 발표하고 2014년 1단계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등 오랜 시간 동안 인내심을 가지고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킹스크로스는 총 면적 27만㎡ 규모의 부지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유럽 최대의 역세권 개발 사업으로 전체 부지의 56%는 오피스, 24%는 주거, 11%는 리테일, 나머지 9%는 문화·교육·레저·호텔 등으로 채워질 예정이다. 6개의 지하철 노선과 런던 교외를 이어주는 기차, 그리고 프랑스 파리·벨기에 브뤼셀·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 유럽 대륙과 연결하는 유로스타가 출발하는 유럽 최대의 교통 허브이기도 하다. 개발이 완료되면 킹스크로스는 오피스·리테일·주거·대학 등이 어우러진 런던의 새로운 상징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 킹스크로스역 |
|
낙후된 산업유산은 창조의 원천
| 빅토리아 시대인 1852년에 복합창고로 지어진 그래너리 빌딩 |
|
| 현재 그래너리빌딩은 런던예술대학의 센트럴세인트마틴스가 사용하고 있다. |
|
킹스크로스는 영화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 마법 학교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9와 3/4 플랫폼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1852년에 벽돌 건물로 지어진 킹스크로스역은 19세기의 건축 양식을 대표하는 문화유산 중 하나로 손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으나 주변 지역이 낙후되면서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킹스크로스에는 이처럼 낙후된 건물들이 많았는데 이를 모두 철거하는 대신 역사적인 건물을 보존하고 새 건축물을 통해 도시에 활력을 불어 넣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1852년에 복합창고로 지어진 ‘그래너리빌딩’이 대표적이다. 이 건물은 한 때 심하게 낙후되어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보존건물로 지정되어 살아남았으며, 지금은 런던예술대학의 ‘센트럴세인트마틴스’가 이주해 킹스크로스의 상징이 됐다. ‘발전소는 어떻게 미술관이 되었는가’의 저자인 김정후 박사는 이에 대해 “도시에 남은 산업유산은 ‘창조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그래너리빌딩뿐만 아니라 킹스크로스에는 오래된 산업유산을 재탄생시켜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고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은 경우가 더러 있다. 킹스크로스 역사 뒤편에 위치한 ‘가스홀더 넘버 8’도 그 중 하나다. 가스홀더 넘버 8은 1850년대에 킹스크로스역과 주변 지역에 가스를 공급하기 위해 설립된 대규모 가스저장고 중에 하나다. 20세기 들어 도시에 가스를 공급하는 방식이 바뀌면서 쓸모없는 시설이 됐지만 킹스크로스 개발사업에 참여한 도시 계획가들은 가스 저장고를 철거하기 대신 공공성이 높은 건물로 변화시켰다. 현재 가스홀더 넘버8은 아파트와 다목적 공원으로 재탄생됐다.
| 오래된 가스저장고를 활용해 아파트로 재탄생시킨 건물 |
|
IT기업과 디자이너, 아티스트들 몰려드는 활력 넘치는 지역으로
특히 킹스크로스는 최근 정보기술(IT) 기업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으면서 젊고 활력이 넘치는 거리로 변하고 있다. 구글 영국 본사인 ‘랜드스크래퍼(landscraper)’가 대표적이다. 구글은 지난 2013년 10억파운드를 투입해 추진하는 새 영국 본사 건립 계획을 발표했으며, 2018년부터 착공을 시작했다. 구글 영국 본사는 11층짜리 빌딩이지만 길이는 약 329미터로 런던 최고층 빌딩인 ‘더 샤드(The Shard)’의 높이(약 301미터) 보다 더 긴 고층 빌딩이 누워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설계됐다. 랜드스크래퍼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바로 이러한 독특한 형태 때문이다. 구글의 새 영국 본사에는 약 7,000여명의 임직원이 근무할 예정이라 킹스크로스 일대의 모습을 크게 바꿀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페이스북 2018 년 킹스크로스 주변의 3 개 건물에 걸쳐 5만 7,000 ㎡의 사무실을 계약하고 약 6,000여명이 근무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바 있다. 한국 기업 중에서도 삼성전자가 지난해 킹스크로스에 쇼케이스 공간 ‘삼성 킹크로스’를 선보인 바 있다.
| 킹스크로스에 위치한 구글의 영국 본사 신사옥 |
|
구글이나 삼성전자와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젊은 디자이너와 아티스트 등을 유치해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도 엿보인다. 실제 톰 딕슨도 킹스크로스로 본사를 옮겼으며, 폴 스미스, 마가렛 호웰 등 영국을 대표하는 인테리어·패션·디자인 업체들도 킹스크로스에 자리를 잡았으며, 루이비통과 같은 럭셔리 브랜드, 세계 3대 레코드 회사 중 한 곳인 유니버설뮤직도 킹스크로스에 둥지를 틀었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킹스크로스에도 매장을 내고 런던과 서울을 기반으로 패션 사업을 하고 있는 이민영 애민앤폴 대표는 “킹스크로스는 대규모 개발을 진행하고 구글 같은 큰 기업을 유치하는 동시에 인디 브랜드나 신진 디자이너 등을 유치하기 위한 지원도 많이 했다”며 “첫 입주 당시에는 1년 정도 렌트프리를 받고 매장을 운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2001년부터 킹스크로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아젠트의 로버트 에반스는 “구글과 같은 IT 기업, 러셔리 브랜드 루이비통, 런던예술대학의 센트럴세인트마틴스 등은 다양한 기반의 입주자를 갖추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며 “특히 혁신적인 IT 기업과 예술 대학을 유치하면서 킹스크로스가 런던에서 가장 창의적이고 활력 넘치는 지역이 됐다”고 말했다.
장기적인 관점과 유연한 접근, 그리고 커뮤니티와의 관계 형성
| 킹스크로스의 시기별 변화 /사진=킹스크로스 홈페이지 |
|
킹스크로스 프로젝트는 최근 도시재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20여년 동안이나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추진되는 프로젝트라는 점이다. 반면 한국에서 추진되는 도시재생 사업들이 대부분 단기 성과 위주로 추진되다 보니 여러 문제점이 발생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출범 초기 ‘도시재생 뉴딜’을 통해 도시재생 정책의 판을 바꾸겠다고 했지만 여전히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아젠트의 에반스는 ”프로젝트 초기부터 유연성과 협상, 변화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고 유기적인 과정으로 접근했다”며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프로젝트 개발을 추진하면 개발자는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킹스크로스는 커뮤니티와의 관계 형성에도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장기적인 프로젝트인 만큼 지역 주민들과 단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스킵 가든(Skip Garden)’이다. 스킵 가든은 도시 워크숍과 커뮤니티 키친, 커뮤니티 아트 등을 통해 시민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재생 공간이자 프로그램으로 킹스크로스 프로젝트와 커뮤니티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