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일 오후 5시25분 서울 외교부청사. 외교부 내부에서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 협상과 관련해 ‘고위급에서도 협의했으나 아직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분위기는 삽시간에 어수선해졌다. 복수의 청와대·정부 관계자들로부터 SMA가 이미 ‘잠정 타결’돼 ‘이르면 이달 1일 발표’될 것으로 알려진 상태에서 ‘고위급’까지 나섰는데, ‘합의에 실패했다’는 결과가 나오자 기자들도 혼란스러워 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대다수 언론은 청와대와 정부의 자신감만 믿고 늦어도 2일이나 3일에는 합의 발표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일 오후 한 정부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1일과 2일) 한국과 미국이 모두 깨어 있는 시간에는 긴장하고 지켜봐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관련기사>▶한미방위비협정 잠정 타결... 협상주기 1년→5년 합의
현재 SMA 협상은 청와대와 정부의 당초 주장과는 달리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잠정안을 거부했다는 분석이 우세한 가운데 이제는 세부사항 조율을 위한 ‘막판 진통’ 단계조차 아니라는 진단까지 나온다. 미국 당국이 공식적으로 협상을 더 끌어가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면서 트럼프 대통령 속내도 파악하지 못한 채 미리 잠정안 정보를 흘린 청와대와 정부의 대응이 너무 아마추어적이었던 게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된다. 여기에 주한미군 사령관까지 트위터로 ‘김칫국’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한국 정부는 더욱 무안한 입장에 처했다.
|
판 뒤집은 트럼프... 최종 합의는 ‘안갯속’으로
정부와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제11차 한미 SMA 협상은 이번 주말에도 최종 합의를 끌어내기 힘들 전망이다. 외교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협상이 다 됐다가 안 되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일이 많다”며 “최종 합의까지 간다는 게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클라크 쿠퍼 미 국무부 정치·군사 담당 차관보 역시 3일(현지시간 2일) 언론과의 화상 브리핑에서 “한미 방위비분담금 협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며 ‘공정한 합의’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협상은 서울과 워싱턴 간에 진행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협상이 대표단뿐 아니라 ‘청와대-백악관’ 차원에서도 이뤄진다는 점을 암시한 것이다.
미 국무부는 또 이날 한국 특파원들에게 e메일을 보내 “한국과의 협상은 진행 중”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동맹들이 더 기여할 수 있고 더 해야 한다는 기대를 분명히 해왔다”는 입장을 재강조했다. 국무부 당국자가 질의답변 형식이 아니라 한국 언론에 먼저 입장자료를 배포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 정부가 협상에 언론을 활용한다고 판단한 미국 정부가 역으로 한국 언론에 맞불을 놓은 게 아닌지 의심되는 대목이었다.
전문가들은 SMA 최종 타결이 난항에 빠진 건 결국 한국을 더 압박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 때문으로 분석했다. 실무진이 협의한 잠정안을 트럼프 대통령이 막판에 거부했다는 진단이 힘을 얻고 있다. 이는 주한미군 내 한국인 근로자 무급휴직이 강행된 과정만 봐도 추정이 가능하다. 미국 NBC방송에 따르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이 문제를 막기 위해 지난달 31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설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무급휴직을 강행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미국 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심각하다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협상 보고가 제대로 안 된 게 아니냐는 추측은 잘못된 것”이라며 “방위비 협상 내용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차질 없이 보고된다”고 설명했다.
‘잠정합의’ 미리 흘렸다가 역공... 체면 구긴 靑
트럼프 대통령의 사업가 기질과 변덕은 이미 세간에 많이 알려진 상태다. 그는 지난해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2차 정상회담에서도 돌연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 예측불가의 협상가라는 인식을 더 확실하게 심어줬다.
문제는 우리 청와대와 정부의 성급한 대응이었다. 청와대와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최종 재가가 대미 외교에서 가장 큰 변수임에도 실무진 간 잠정 합의 사실을 국내 일부 언론에 미리 흘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정상 통화 한 방으로 앞길이 안보이던 SMA 협상을 급진전시킨 것처럼 분위기만 잡아 놓고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에 역공을 당한 모양새가 됐다. 수조원이 걸린 외교 문제에서는 흔하게 발생하는 상황은 아니다.
첫 테이프는 “막바지 조율을 하고 있다”고 운을 뗀 정은보 한미방위비분담협상대사가 끊었다. 1일 부로 주한미군 내 한국 근로자 4,000여 명이 사상 초유의 무급휴직 사태를 맞게 된 상황에서 그는 바로 전날 오후 영상으로 입장을 밝혔다.
정 대사는 당시 “상당한 의견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조만간 최종 타결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근로자들과 여론을 안심시키려는 목적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미 3월 17~19일 열린 7차 회의에서 합의를 보지 못하고 무급휴직이 강행된 상황에서 ‘조만간 최종 타결’이라는 문구는 가벼운 표현이 아니었다.
불씨에 기름을 부은 건 청와대와 정부 고위관계자들이었다. 31일과 1일 청와대와 정부 내부에서 일부 언론에 ‘잠정 타결’ ‘이르면 1일 발표’ 등의 정보를 흘리면서 기대감은 정점에 이르렀다.
심지어 마치 양국 간 합의가 사실상 끝난 듯 유효기간 5년으로 연장, 총액 1조원의 ‘10%+α’ 등과 같은 세부정보까지 정부 내부에서 기정사실처럼 유통됐다. ‘지난달 24일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간 통화 이후 협상이 급물살을 탔다’ ‘미국에 코로나19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진단 키트를 원조해주는 조건이 통했다’ 등 허황된 분석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끝까지 부인하지 않고 묵인했다. 나아가 SMA 성과가 클 경우 관례를 깨고 외교부가 아닌 청와대가 사상 처음 직접 결과를 발표할 것이라는 얘기도 정부 내부에서 유력하게 돌았다.
그러다 2일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 ‘고위급’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폼페이오 국무장관이라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분위기는 급랭됐다. 한 정부 관계자는 협상이 자꾸 꼬인 채 길어지자 “방위비 협상 관련은 이제 좀 그만 다루고 싶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김칫국’ 리트윗 논란... “김치 즐겨먹어” 더 이상한 해명
이런 와중에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은 지난 2일 한미 합의 결렬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김칫국 마시다’라는 문구를 리트윗해 논란을 더 키웠다. 한국 정부의 협상 자세를 비꼰 것으로 추정되는 이 글귀에 대해 ‘무례하고 부적절한 언사’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2일 저녁 7시16분께 자신의 트위터에 다른 트위터 사용자가 올린 ‘김칫국 마시다’라는 글귀가 적힌 사진을 리트윗했다. 사진에는 ‘김칫국 마시다’의 한국어 발음에 대한 영어 표기(gimchitguk masida)와 뜻(to drink kimchi broth)이 함께 적혔다. 아울러 ‘알이 부화하기 전 닭을 세다(to count one‘s chickens before they hatch)’라는 영미권의 유사 격언도 함께 병기됐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앞서 “나는 오늘 부화하기 전 닭을 세지 말라는 것이 때가 될 때까지 김칫국을 마시지 말라는 것과 같다는 것을 배웠다”며 “한국어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을때 통역사의 하루가 편해진다”고 밝히기도 했다.
에이브럼스 사령관의 이 같은 트위터 상 발언은 예상보다 난항을 겪는 SMA 협상 상황과 우리 정부의 ‘잠정 타결’ 정보 흘리기를 비꼰 게 아니냐는 해석을 받았다. 그가 리트윗한 시간 직전에 마침 강경화 장관과 폼페이오 국무장관 간 통화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의 이 트윗에는 즉각 “무례하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사령관까지 나서 한미동맹보다는 협상 압박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비췄기 때문이다. “가슴 아프다, 무급휴직은 우리가 전혀 기대하고 희망했던 일이 아니다”던 1일 페이스북 상 발언에 대해서도 진정성에 의심을 받았다.
주한미군 사령부는 다음날인 3일 “사령관의 트윗은 순수한 (악의가 없는) 것으로 그가 한국 문화를 존중하고 김치를 즐겨 먹기 때문에 어떤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해명했지만 궁색한 변명이라는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윤경환기자 ykh22@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