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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6·4 톈안먼 민주화 시위 사건을 겪은 덩샤오핑은 대학생들의 시위에 우유부단하게 보인 자오쯔양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직에서 몰아내고 대신 장쩌민 당시 상하이시 공산당위원회 서기를 발탁했다. 장쩌민이 혼란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는 기대였다. 이후 조정기간을 거친 후인 1992년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덩샤오핑의 집단영도체제가 공식적으로 완성된다. 덩 체제의 핵심은 정치는 공산당 독재지만 경제는 국내 개혁과 대외개방을 추진하고 모든 국력을 경제성장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독재지만 공산당 지휘부가 소수로 구성되는 과두제를 통해 집단영도체제를 유지하고 권력자들은 5년씩 두 번 연임해 10년만 집권하면서 세대교체를 통해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라는 것이다.
이른바 ‘안정론’에 대해서는 덩샤오핑이 톈안먼 사태가 한창이던 1989년 2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당시 “중국의 문제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이 안정(중국어로는 穩定)이라는 점이다. 안정적 환경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고 이미 이룬 성과도 잃어버릴 것이다”고 말해다. 여기서 “안정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穩定壓倒一切)”는 중국 공산당 원칙이 나왔다. 여기서 “안정을 위해서는 공산당 독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파생됐다.
사실상 최고 권력자 덩샤오핑은 1992년 제14차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서 장쩌민을 최고지위에 재추인하면서 동시에 장의 후계자까지 못박았다. 바로 후진타오다. 당시 장쩌민이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 주석, 후진타오가 국가 부주석이었다. 덩샤오핑이 장쩌민을 믿지 못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믿지 못했으면 장을 발탁했을 리가 없다. 장쩌민이 10년만 집권하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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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1인 독재를 겪은 후 중국 공산당 내에서는 공산당의 장기집권을 위해서는 개인이 돌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의견일치가 있었다. 즉 집단영도체제를 유지하는 대신 개인들은 일정한 임기 내에서만 활동해야 했다. 10년 임기 제한이 나온 이유다.
장쩌민도 덩샤오핑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도 덩샤오핑이 올려 세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장쩌민은 10년을 통치한 후 2002년 권력을 후진타오에게 물려줬다.
물론 장쩌민의 권력욕을 보여주는 일화도 있다. 중국의 3대 권력은 공산당 총서기, 국가 주석,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중앙군위) 주석이다. 실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권력원을 꼽으라면 중앙군위 주석이다. 장쩌민은 후진타오에게 다른 두 개의 권력을 물려준 후에도 중앙군위 주석을 그대로 유지했다. 그가 중앙군위 주석직까지 물려준 것은 2년이 지난 2004년이었다.
하지만 장쩌민의 시대를 거치면서 최고 권력자 10년 임기라는 대원칙은 확립됐다. 후진타오도 임기의 절반이 지난 2007년 시진핑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시진핑은 이때 과거 후진타오가 ‘황태자’ 시절 가졌던 국가 부주석 직을 차지했다.
후진타오 역시 10년 임기를 마친 2012년 자리에서 물러났다. 세부적으로도 장쩌민과 달랐다. 중앙군위 주석 직을 쥐고 꾸물거린 장쩌민과는 차별되게 3대 최고 권력원에서 깨끗이 물러나고 시진핑에게 모두 인계한 것이다. 이는 시진핑이 강력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기본적인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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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의 유지에 따르면 시진핑도 두 차례 연임으로 10년 임기를 마친 후 올해 2022년 가을 예정인 20차 당대회에서 물러나야 한다. 모든 논란은 시진핑이 그러지 않을 듯하면서 발생하고 있다. 시진핑은 후진타오 때와는 달리 사전에 후계자를 뽑지도 않았다. 중국 내외의 주요 관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시진핑이 3연임에 도전할 것으로 본다. 새로운 임기가 5년 일지, 아니면 더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3연임 집권을 할 경우 이는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식 독재를 막기 위해 만든 집단영도체제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분기점이 될 수 있다.
30년 덩샤오핑 체제는 중국에 어느 정도의 정치안정과 함께 대외갈등 완화라는 혜택을 줬다. 덕분에 중국경제는 매년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구가했고 미국 등 다른 나라들과의 교류도 늘어났다. 이런 덩샤오핑 집단영도 체제가 시작된 1992년은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해이기도 하다.
덩샤오핑 체제를 바꾸려는 시진핑은 아이러니하게 덩샤오핑 체제의 최고 수혜자다. 그의 부친인 시중쉰은 덩샤오핑의 이른바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면서 명성과 권력을 얻었다. 바로 선전을 경제특구로, 오늘날과 같은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키운 사람이 시중쉰이다. 시중쉰은 마오쩌둥과 함께 공산혁명을 참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식 개혁개방이라는 시류에 적극 참여했다. 즉 시진핑은 전형적인 태자당이다. 다만 시진핑이 다른 태자당과 다른 것은 개혁개방 과정에서 능력을 발휘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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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개인사에서 많이 회자되는 것은 ‘하방 7년’이다. 마오쩌둥에게 밉보인 아버지 시중쉰이 문화대혁명(문혁) 기간에 숙청되고 아들인 그도 1969년 지방으로 하방됐다.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 마을에서 어렵게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인간개조’를 겪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다만 이런 중에도 그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고 규제가 다소 풀리면서 1973년 공산당에 가입하고 1975년 칭화대에도 입학한다. (문혁은 공식적으로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 끝났다.) 1979년 칭화대를 졸업 후에는 당시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이었던 겅뱌오의 비서가 됐다. 겅뱌오는 부친 시중쉰과 공산혁명 동지였다. 당시 중앙군위 주석이 덩샤오핑이었다. 시진핑은 부친의 후광으로 다른 태자당 구성원들처럼 중앙정계에서 화려하게 살 수도 있었다. 다만 시대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줬다.
1980년대 초반은 중국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다. 덩샤오핑의 주도 아래 1978년 경제성장에 우위를 두는 이른바 ‘개혁개방’이 시작됐다. 하지만 대강의 목표만 나왔을 뿐 개혁개방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무슨 지향점을 두고 움직일 것인지는 애매모호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문혁식 규제를 풀자는 인식은 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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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등 중국 공산당내 경제개혁파들은 장칭 등 문혁파와 사생결단 투쟁을 벌였다. 장칭 등 4인방은 몰아냈지만 여전히 마오쩌둥식 체제를 추종하는 ‘문혁파 잔당’ 화궈펑과 대립했다. 정치적으로는 문혁파와 화궈펑까지 넘어서고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았지만 여전히 정세는 유동적이었다. 중앙정부 뿐만이 아니라 지방정부, 기업, 기관 등 사회 저변에 포진한 채 재기를 노리는 문혁파를 솎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덩샤오핑은 이때 제2의 하방을 추진한다. 중앙 정계에서 젊고 유능한 개혁파를 지방으로 보내 지방권력까지 교체하게 한 것이다. 이른바 ‘제3 제대 건설’ 이론이다. 과거 산시성 산골로 강제적 하방됐던 시진핑이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이번에는 권력자로서다.
중앙군위 비서장의 비서 자리를 버리고 지방에 내려간 시진핑이 받은 직위는 1983년 수도 베이징의 남쪽인 허베이성 정딩현 공산당위원회 부서기다. 우리식으로 하면 부군수급이다. 29세 젊은이가 한순간에 지방 권력자가 된 셈이다. 기존 지방에 포진하고 있던 문혁파들이 제거된 상황에서 이런 자리들이 개혁파로 충당되면서 그가 혜택을 입었다. 이런 의미에서 시진핑도 덩샤오핑이 발탁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시진핑은 계속 승승장구한다. 그가 지역 책임자로서 일한 것은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 푸저우시 당서기, 저장성 당서기 등이다. 마지막 지방 근무가 상하이시 당서기다. 모두가 당시 개혁개방 과정에서 중요성이 부각된 곳이었다. 부친 시중쉰이라는 배경이 아니었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자리들이다. 물론 그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 어쨌든 그도 지역을 발전시킨다.
그가 중국 최고권력을 장악할 기회는 후진타오파와 장쩌민파의 충돌에서 비롯됐다. (덩샤오핑은 1997년 사망했다.) 후진타오의 집권 중반인 2006년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천량위가 후진타오와 충돌하면서 숙청됐는데 후임 상하이시 서기로 시진핑이 발탁됐다. 천량위는 장쩌민파(상하이방)이었는데 후진타오가 천을 몰아내는 대신 장과 가까운 시진핑이 천의 자리를 잇는 것을 허용했다. 태자당으로서 상하이까지 안정시킨 공로로 시진핑은 2007년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이듬해에 국가 부주석이 되면서 후진타오의 후계자 자리까지 거머쥐었다. 아버지가 못한 일을 아들은 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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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체제의 모순은 2012년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식 개혁개방과 집단영도 시스템에서 성장한 그가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게 된 것이다. 시진핑은 집권한 후 권력을 계속 강화했다. 공산당 체제에서는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후진타오 시대의 시스템이 부패와 무능을 양산한다고 공격하면서다.
장기집권을 겨냥한 시진핑이 내건 목표는 중국의 초강대국화다. 덩샤오핑의 ‘자세를 낮추고 기회를 기다린다’는 식의 ‘도광양회’가 아니라 이미 일어섰다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중국몽’을 내세웠다. 중국이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가 성장해야 했고 사회가 안정돼야 했고 덩달아 권력도 강해야 했다. 주기적 권력교체는 권력 자체를 불안정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의중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2018년 시진핑이 한 차례 5년 임기를 마쳤을 때다. 기존 덩샤오핑식 집단영도 시스템에서는 후계자를 미리 결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진핑은 헌법을 아예 바꿔 국가 주석 직의 연임 제한을 없앴다. 영구집권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미 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위 주석 직은 연임 제한이 없다. 즉 국가 주석 직의 연임 제한까지 없앴다는 것은 시진핑이 권력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과시에 다름 아니었다. 후계자 선정은 당연히 무시됐다.
덩샤오핑식의 집단영도와 개혁개방 시스템은 올해 파괴되거나 적어도 크게 손상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주기적인 권력교체와 여러 사람이 나눠서 권력을 행사하는 과두제는 시진핑이 장기집권에 나서고 권력도 그의 수중에 집중되면서 무너지고 있다. 개혁개방과 자율적인 경제체제는 중국사회가 경직되고 미국 등 서방의 반발이 커지면서 이미 무너진 상태다. 2018년 3월 중국 헌법 개정과 함께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분명하다.
2019년 말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도 결과적으로 시진핑의 개인독재 강화에 도움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팬데믹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국의 체제는 더 험악해졌다. 그나마 남아있던 중국인 개인의 자유도 위축됐다.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중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리·통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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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은 18일 중국 공산당내 감찰 조직인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9기 6차 전체회의에 나서서 “형식주의와 관료주의는 당과 국가사업의 큰 적”이라며 “대중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모든 부패와 비리를 바로잡아야 한다”며 당원들에게 경고했다. 시진핑이 지난해 7월 1일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식에서는 “(중국을 괴롭히면) 14억 인민이 피와 살로 쌓은 강철 만리장성 앞에서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흐를 것”이라고 말한 이후 중국 관료사회에서는 이것이 ‘유행어’가 된 상태다.
시진핑의 장기집권·개인독재 강화와 함께 중국에서의 기업과 사회에 대한 규제는 한층 심해지고 미국 등과의 대외 갈등도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공산당 정부의 최고 치적이라는 고도 경제성장을 위한 경기부양책이 올해 한층 확대되는 가운데 경제성장과 거품과의 알력도 심해질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지난해 12월 연례 중앙경제공작(업무)회의에서 2022년 올해 구호로 “안정을 우선으로 하되 안정 속에 성장을 추구한다(穩字當頭, 穩中求進)”을 내걸었다. 이들 말이 기존 덩샤오핑의 지론을 반복하는데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올해 불안정성·불확실성은 더 커질 전망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중국은 올해 시진핑의 권력장악을 위협할 수 있는 사회적 불안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안정적 경제성장과 함께 사회질서 유지에 집중할 것”이라고 전했다.
/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