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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가 낸드플래시에서 첫 300층대 제품을 내놓으며 업계 1위 삼성전자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고대역폭 메모리(HBM)에 이어 최근 D램에서도 기술력에서 추월을 허용했다는 평가를 받는 삼성전자는 낸드 적층 경쟁에서도 최초 타이틀을 내주며 경쟁 열위가 메모리 제품 전반으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22일 업계에 따르면 하이닉스는 전날 321단 1Tb(테라비트) 트리플레벨셀(TLC) 낸드 플래시를 양산하기 시작했다고 알렸다. 이 제품은 3개의 비트를 저장할 수 있는 셀을 321층으로 쌓아 총 1Tb의 용량을 구현했다.
이전까지 업계 최고층 제품은 200단대다. 300단대 제품은 SK하이닉스가 이번에 처음 양산에 성공했다. 신제품은 전 세대 제품보다 데이터 전송 속도는 12% 빨라졌고, 읽기 성능은 13% 향상됐다. 데이터 읽기 전력 효율도 10% 이상 높아졌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321단 낸드로 인공지능(AI)향 저전력 고성능 신규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해 활용 범위를 점차 넓혀갈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의 300단 제품 선점 소식에 삼성전자 내부에는 위기감이 감지된다. 낸드 제품의 용량을 확장하기 위해 데이터를 저장하는 셀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쌓는 기술을 가장 먼저 상용화한 원조는 다름 아닌 삼성전자다. 삼성전자는 2013년 수직으로 셀을 쌓는 ‘V(Vertical)낸드’를 업계 최초로 선보였다. 이후 낸드 업계에서는 얼마나 더 높은 단을 쌓느냐가 기술 경쟁의 표준이 됐다. 한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전 세대에서는 양산준비평가의 기준이나 조건을 바꿔서라도 최초 개발 시점을 삼성전자가 선점했는데 이제는 SK하이닉스의 기술력이 많이 올라와 이조차 쉽지 않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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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드는 그간 D램에 비해 AI 수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데이터센터에서 AI 컴퓨팅을 지원하기 위해 빠르고 성능 좋은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가 필요해지면서 기업용SSD(eSSD)를 중심으로 수요가 HBM 만큼이나 급증하고 있어서다. 특히 SK하이닉스는 AI발 낸드 훈풍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기업 중 하나다. 올해 3분기 SK하이닉스의 eSSD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무려 430%나 상승하며 전체 SSD 매출의 60%를 차지했다.
SK하이닉스는 eSSD를 중심으로 한 낸드 경쟁력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최근 그룹의 AI 전략을 지휘하는 최태원 SK 회장은 SK하이닉스의 자회사 솔리다임의 이사회 의장직을 맡게 됐다. 솔리다임은 업계에서 유일하게 쿼드러플레벨셀(QLC) 낸드를 양산하는 기술력을 갖추며 eSSD 공급을 주도하고 있다. QLC는 셀당 비트를 네개까지 저장할 수 있다. 그만큼 용량효율성이 높아 현재까지 고용량이 필수적인 AI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eSSD와 최적의 궁합을 가진 것으로 평가된다. 업계 관계자는 “AI 데이터센터에는 PC, 모바일보다 높은 용량과 빠른 속도의 저장장치가 필요하다”며 “기존 HDD 대비 eSSD는 성능이 장점이지만 가격이 장벽이었는데 QLC 기반 제품은 타 기술 대비해 용량이나 비용 효율이 높아 AI 데이터센터의 러브콜을 집중적으로 받고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에게 낸드는 사수해야 할 마지막 방어선이다. 메모리 업계의 큰 형님으로 군림해 왔던 삼성전자는 AI 발 지형 변화를 맞아 만년 2등 SK하이닉스에게 HBM과 D램에서 차례로 위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HBM 시장에서는 최대 포식자인 엔비디아를 SK하이닉스에 완전히 내줬고 양산을 앞둔 차세대 D램(D1c) 양산 경쟁에서도 SK하이닉스가 다소 앞서고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D램과 HBM에 이어 낸드플래시까지 삼성전자가 추격을 허용한다면 SK하이닉스로서는 3연타를 맞는 것이고 이는 업계에 시사하는 상징성이 클 것”이라며 “당장 삼성전자의 매출 점유율이 압도적이지만 나홀로 성장 중인 eSSD 시장에서의 선전을 바탕으로 이 격차도 금방 좁혀질 수 있다”고 말했다.
/허진 기자 hj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