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이어 일본마저 열연강판을 자국 판매가보다 13% 낮은 가격에 덤핑식으로 밀어내면서 ‘산업의 쌀’로 불리는 국내 철강 산업이 이중고를 겪고 있다. 철강 업계는 국내 철강 시장을 지키기 위해 열연에 반덤핑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부는 반덤핑관세가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고 열연을 사용하는 제강사들의 이익을 해친다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12일 철강 업계에 따르면 일본이 국내로 수출하는 열연강판의 평균 가격은 톤당 500달러(약 71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내수용으로 사용되는 열연강판의 경우 톤당 700달러(약 100만 원) 수준에서 형성돼 있는데 이보다 28.6%나 낮은 가격에 한국으로 밀어내기 수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국내에 판매하는 열연강판의 가격은 국내 유통가보다 13.4%나 낮다. 이달 6일 기준 국내 열연강판 유통가는 82만 원이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가격보다 싼값에 일본산 열연강판 제품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일본산 제품의 수입량이 날이 갈수록 급증하면서 저가 제품이 점점 국내 철강 시장을 잠식·교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국내에 수입된 열연강판은 총 342만 7537톤으로 집계됐다. 이 중 일본산은 177만 103톤으로 비중은 51.64%다. 특히 11월에는 전체 수입량(28만 1405톤) 중 64.37%가 일본산 제품이었다.
철강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본이 지난해부터 열연을 저가로 한국과 동남아시아에 팔기 시작했다”며 “2년 동안 일본과 중국산 철강 제품이 국내 시장을 잠식하고 있지만 별다른 해법을 내놓지 못하면서 철강 업계의 수익성만 하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과 중국이 한국으로 저가 철강재를 쏟아내기 시작하면서 불황에 빠진 국내 철강 업계의 상황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 저가 제품이 국내로 유입될수록 철강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판매 가격을 낮추며 수익성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일본과 중국산 제품이 국내로 들어오자 한국에서 유통되는 열연강판 가격은 2022년 7월 톤당 122만 원에서 최근 82만 원으로 32.8%나 하락했다. 국내로 유입되는 일본·중국산 열연강판의 규모가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11월까지 국내로 수입된 열연강판은 총 342만 7537톤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422만 톤보다 수입 물량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자국 시장보다 낮은 가격에 수출되는 중국과 일본산 열연이 국내로 꾸준히 유입되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2022년 태풍 힌남노 등의 영향에 국내 수급이 꼬이자 열연 제품의 수입이 늘어났다”며 “국내 수급이 정상화됐는데도 일본과 중국의 열연 수출이 계속 이어지면서 열연 시장의 불황이 지속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열연강판은 그 자체로도 사용되지만 후공정 과정을 통해 자동차용 강판, 파이프 등 강관재, 건축 자재 등으로 만들어져 산업 전반에 사용되는 중간재 성격의 철강재다. 국내에서는 포스코와 현대제철(004020)이 열연강판을 생산한다.
외국산 저가 철강재가 범람하며 철강사들의 실적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철강재 시황에 따라 실적 변동 폭이 상대적으로 큰 현대제철은 올해 3379억 원의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해보다 절반 넘게 감소한 실적이다. 2조 4000억 원의 이익을 벌어들였던 2021년 대비로도 이익 규모가 크게 줄었다.
이에 철강 업계는 중국산 후판에 이어 열연강판에 대한 반덤핑 제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앞서 현대제철은 3분기 실적 설명회에서 “후판 제품뿐만 아니라 열연강판에 대해서도 산업 피해 심각성에 관한 사실관계를 파악 중이며 적극적으로 반덤핑 제소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고 포스코 역시 “불공정무역 행위에 따른 수입재 규제는 당연히 시행해야 한다”며 반덤핑 제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덤핑 관세 제도는 외국의 물품이 수출국 내 시장가격 이하로 판매돼 국내 산업이 피해를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을 경우 관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무역 구제 제도다. 덤핑을 막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로는 수출 중지, 관세 부과 등이 있다.
현대제철은 올해 7월에도 중국산 저가 후판을 상대로 반덤핑 제소를 진행했고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무역위원회는 10월 4일부터 조사에 돌입했다. 현재 잠정 관세 부과를 검토 중이며 이르면 내년 1월 관세 부과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일각에서는 열연강판의 경우 실제 과세가 이뤄질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먼저 외교적 문제가 걸림돌이다. 국내 산업의 피해가 있고 덤핑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관세를 부과하더라도 일본이 다른 한국산 수입 제품에 보복 관세를 부여하는 등 외교 문제로 비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진 뒤로 외교적인 노력으로 풀 수 있는 여지도 적어졌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일본과 국장급 수출 관리 정책 대화를 연례화해 수출 제도 관련 현안이 발생했을 때 신속히 정책 대화를 열어 적절한 대응책을 강구할 것을 협의하는 등 대화 창구를 마련했다. 철강 업계의 문제를 테이블 위로 올려 해결할 수 있지만 이마저도 어려워진 것이다.
업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일본산 제품을 상대로 관세를 부과한 적이 없어 정부 입장에서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중국도 한국이 후판에 이어 수출 비중이 큰 열연까지 관세를 매기면 반발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열연강판을 원재료로 사용하는 제강 업체들은 포스코·현대제철과 입장이 다르다는 점도 정부에는 부담이다. 관세가 실제 부과되면 수입되는 경쟁 제품의 가격이 높아져 대형 철강사에는 유리해지는 반면 제강 업체들의 원가 부담은 크게 증가하기 때문이다. 동국제강·세아제강·KG스틸 등 중견 제강사들은 포스코와 현대제철로부터 열연강판을 구매하거나 일본·중국에서 수입한 제품을 활용해 냉연강판·컬러강판 등을 생산한다.
이윤희 포스코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10일 국회에서 열린 ‘철강 산업 통상 환경 변화 및 대응 방안’ 세미나에서 “국내 철강 시장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수입 철강재 대상 조강국 모니터링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며 “이외에도 불공정 무역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적절한 무역 규제를 추진하는 동시에 산업 피해 최소화를 위한 법 제도 개선 강화가 요구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