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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위기 상황에도 이를 극복하려는 국내 기업들의 노력이 여전히 부족한 것으로 조사됐다. 남성 임직원 의무 육아휴직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여전히 극히 일부에 불과했으며, 출산 및 양육 지원 제도 운영에 소극적인 기업들이 많아 산업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정책 개발이 시급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비영리 민간 인구정책 전문기관인 한반도미래인구연구원(한미연)은 ‘2025 인구경영 우수기업 기초평가’ 결과, 기업의 인구위기 대응 수준이 평균 52.2점(100점 만점)에 머물렀다고 밝혔다. 이번 평가는 올해 1월 기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발간한 기업 중 자산규모 상위 3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평균 점수는 전년(50.1점) 대비 2.1점 상승했지만 여전히 기업의 출산·양육 지원 정책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별로는 정보통신업(60.5점), 도·소매업(58.3점), 전자 기계 및 장비 제조업(58.1점) 순으로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인구 위기 대응 점수가 높은 기업으로는 KB국민카드(80.8점), KB국민은행(79.8점), 롯데정밀화학·롯데케미칼·삼성생명(76.9점) 순으로 평가됐으며, 이들 기업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 지원’ ‘출산 및 양육 지원 제도 운영’ 항목 등에서 전체 평균을 크게 상회했다.
반면, 건설 및 부동산업(46.4점)처럼 여성 임직원 비율이 낮거나 증권 및 기타 금융 서비스업(50.0점)과 같이 고용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산업은 평가 결과가 저조했다. 한미연은 이처럼 산업별 특성과 기업 규모에 따라 제도 도입에 차이가 뚜렷한 만큼 산업별 환경을 고려한 맞춤형 정책 개발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기초평가 결과, 17개 평가지표 중 12개 지표에서 전년 대비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특히 ‘기혼 여성 ·임신부 차별 금지 정책 보유(21.3점)' ‘지방 소멸 대응 정책/제도 운영(17점) 부문 개선이 두드러졌다. 반면 ‘배우자 출산휴가 제도 운영(-6.5점)' ‘직장 내 어린이집 운영(-2.3점)' 등 출산과 양육 지원 핵심 지표에서는 오히려 점수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평가대상 기업 중 남성 임직원 의무 육아휴직 제도를 운영하는 곳은 12개(4%)에 불과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중 9개 기업이 롯데그룹 계열사였고, 그 외에는 한미글로벌, 한국콜마홀딩스, 코스맥스비티아이이 남성 임직원의 육아휴직 제도를 의무화하고 있었다. 한미연은 전년 대비 3개 기업이 늘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육아의 책임이 여성에게 편중돼 있음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분석했다. 다만, 지난해 11월 정부의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에 따라 육아휴직 사용률이 공시 의무화된 만큼 향후 기업의 남성 육아휴직 제도 이행 수준이 점진적으로 개선될 것이란 전망이다.
직장 내 어린이집 운영 비율은 전년 70.3%에서 올해 68.0%로 1.7% 포인트 감소했다. 법적 설치 의무가 있는 249개 기업 중 55개는 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어린이집 설치 및 운영에 드는 비용이 의무 불이행 시 부과되는 과태료(최대 연간 1억 원)보다 크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고 한미연은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법적 설치 의무가 없는 롯데캐피탈, 두산퓨얼셀, 카카오게임즈 등 10개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직장 어린이집을 운영해 모범 사례로 꼽혔다.
출산·육아휴직 후 직장에 복귀하는 임직원을 위한 '온보딩 지원제도'를 운영하는 기업은 전체의 8%(24개)에 그쳤다. 한미연은 이는 육아휴직 후 직장 적응과 경력 단절 방지에 중요한 요소임에도 대부분의 기업이 관련 지원을 제공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법적 의무 기간을 초과해 출산휴가를 보장하는 기업은 31개, 배우자 출산휴가를 확대 제공하는 기업은 26개인 것으로 조사됐다.
유혜정 한미연 인구연구센터장은 “지난해 대비 많은 지표에서 개선이 이뤄진 점은 고무적”이라고 평가하며 “인구구조 변화로 인한 인력 부족 현상이 점차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인구 위기를 기업의 생존 문제로 인식하고 가족 친화적 문화 확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