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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인 40대 김 모 씨는 올 초 2022년 7월부터 문자로 받아오던 로또 번호 추천이 끊기자 이상함을 느꼈다. 김 씨는 “가입비 26만 원을 내면 로또 당첨 확률을 높여주는 추천번호를 3년간 보내주겠다”는 A 회사의 권유를 받고 이 회사와 상품 가입에 대한 전자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전자계약은 믿을만 하다고 생각했던 김 씨는 뒤늦게 A 회사 사이트에 접속했지만 ‘홈페이지에 연결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만이 올라온 상태였다.
온라인 전자계약 서비스의 허점을 이용해 부당한 계약을 맺게 한 뒤 금전적 피해를 입히는 사기가 발생해 주의가 요구되고 있다. 23일 서울 도봉경찰서에 따르면 이달 중순 A 회사에 대한 진정서가 접수됐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이 타 경찰서로 이송돼 해당 계좌 관련 병합 수사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김 씨는 “유명 전자계약 서비스를 이용해 안전하게 계약이 진행된다고 하길래 돈을 떼일 걱정은 전혀 못 했다”고 호소했다
계약 간소화라는 이점으로 사용이 급증한 전자 계약이 신종 사기 수단으로 급부상하는 모양새다. 실제로 김 씨는 가입비를 입금하자마자 문자로 온 전자계약서 링크를 통해 전자서명을 완료했다. 주식회사 측은 이후에도 “법적 효력이 있는 전자계약서로 가입했기 때문에 법적 보호를 받아볼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전자계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라인 전자계약 플랫폼에는 이용 주체에 대한 제한이 따로 없었다. 현재 대다수 국내 전자계약 플랫폼에선 누구나 계약 문서를 업로드한 다음 불특정 다수에게 전자서명을 요청할 수 있다. 개인 또는 집단이 사칭을 하거나 ‘유령회사’를 만들어서 금전적 계약을 요구할 경우 계약 당사자는 피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김 씨가 계약을 체결한 운영사는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가짜 회사였다.
전자계약의 합법성을 빌미로 신뢰를 형성한 뒤 돈을 받고 연락을 두절하는 식의 수법은 다른 신종 사기 유형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50대 직장인 박 모 씨는 지난해 9월 한 쇼핑몰로부터 3인 1조 형식의 구매대행 부업에 참여했다가 4400만 원을 잃었다. 일단 본인부담금으로 구매대행 주문을 하면 이틀 후 원금을 수익과 함께 돌려준다는 내용의 전자계약서를 체결했지만, 쇼핑몰 측은 수익은커녕 원금도 지급하지 않았고 쇼핑몰 홈페이지는 폐쇄됐다.
전자계약 플랫폼 측은 계약 사기 등 피해가 발생해도 이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업체는 “계약은 당사자 간 상호 동의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해결해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신뢰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전자계약 플랫폼으로 인해 소비자들의 사기 위험이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구체적인 건수 파악은 어렵지만 전자서명 등을 통한 사기계약 사례는 다수 있을 것이라 추정된다”고 경고했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계약 체결 시 거래 당사자의 신뢰성과 계약 내용의 완전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계약 자체가 원천 무효로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신원 확인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온라인 거래가 가지고 있는 익명성이 악용될 소지가 커진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