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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격화하는 미중 관세 전쟁 속에서 출구를 찾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직접 만나 투자 유치전을 벌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에 대한 주요 무역 상대국의 반발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대외 개방 의지를 재차 강조하며 경제적 ‘우군’을 확보하려는 행보로 읽힌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과 유럽연합(EU)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 수장들은 세계 최대 시장인 중국 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시 주석과의 이번 만남에 적극적이었다는 후일담도 나왔다.
시 주석은 28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중국발전고위급포럼(CDF)에 참석했던 글로벌 CEO들과 ‘국제공상계 대표 회견’을 갖고 “중국은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외국 기업인들에게 이상적이고 안전하며 유망한 투자처”라고 강조했다. 중국이 고속 성장 시대를 지나 일본과 같은 장기 저성장의 늪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3년째 5% 안팎의 성장 목표를 제시한 안정적인 투자처라는 점을 재차 강조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시 주석은 “중국은 개혁 개방을 진전시키고자 확고하게 전념하고 있다”며 “개방의 문은 더 넓게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회견이 진행된 인민대회당 동대청은 각국 정상과의 회담 등 주요 행사가 이뤄지는 곳으로 시 주석이 글로벌 CEO들을 그만큼 예우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그만큼 중국이 내수 침체와 미국과의 무역 갈등 속에 외국 기업들의 ‘투자’를 간절하게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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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주석은 지난해 CDF 후 미국 기업 CEO 및 학계 인사들과 만난 데 이어 이번에도 2년 연속 기업인들과 회동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 등 한국 기업 대표들을 비롯해 프레더릭 스미스 페덱스 회장, 스튜어트 걸리버 HSBC홀딩스 CEO, 히가시하라 도시아키 히타치 회장, 아민 나세르 아람코 사장 등 40여 명의 글로벌 CEO들과 약속된 자리였다. 당초 CDF에 참석했던 CEO 20여 명과 만날 것으로 예상됐으나 시 주석과의 만남을 위해 별도로 중국을 찾는 기업인들이 늘면서 규모가 예상보다 커진 것으로 분석된다. 이날 약 1시간 20분간 이어진 면담에선 곽 사장 등 7명의 기업인이 중국 시장의 현실과 전망에 관해 발언하는 시간도 마련됐다. 중국 당국이 업종·국가별로 대표성을 띠는 외자기업을 일일이 배정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시 주석은 CEO들의 발언을 들은 뒤 자신과 그 기업의 개인적인 인연, 해당 국가와 중국의 관계를 따로 언급하며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시 주석은 글로벌 기업 수장들에게 “중국 내 외국인투자기업에 대한 동등한 대우를 보장하고 공정한 시장 경쟁을 유지할 것”이며 “외국 기업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중국 내 무역과 투자를 위해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며 법에 따라 외국인투자기업의 정당한 권리와 이익을 보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올해 클라우드 컴퓨팅, 바이오 기술, 외자 독자 병원 개방 시범 구역을 만들었고 앞으로 문화·교육·인터넷 등 영역 개방을 가속화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글로벌 기업들이 국경 간 데이터 이동과 지식재산권 보호, 법 집행 검사, 녹색 인증 등에서 규제를 완화·철폐해달라고 요구하자 “진지하게 연구해 문제가 있으면 제때 해결할 것”이라고 약속하며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시 주석의 이 같은 행보는 중국의 제반 여건이 녹록지 않다는 방증이라는 분석이다. 중국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위축된 소비로 인해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우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월 중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0.7% 하락하며 13개월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부동산 침체가 장기화되고 기업들의 경영 환경도 악화돼 고용 불안까지 이어지며 외국인직접투자(FDI)도 감소하고 있다. 지난해 대(對)중국 FDI 규모는 8262억 위안(약 167조 원)으로 전년 대비 27.1%나 급감했다. 올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다. 1~2월 FDI 규모는 2150억 9000만 위안(약 43조 400억 원)으로 2685억 4000만 위안(약 54조 1800억 원)을 기록했던 지난해 1∼2월에 비해 19.9% 감소했다. 중국 상무부가 “여전히 적지 않은 다국적 기업이 중국 투자를 선택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나섰지만 중국 시장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중국의 시장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글로벌 CEO들도 당국의 눈에 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 경제에 대한 우려가 크지만 중국 정부의 연이은 부양책으로 경기 회복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딥시크 쇼크 이후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중국 첨단 기술 기업과의 교류를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시 주석과 글로벌 CEO들과의 회동이 예상보다 규모가 커진 원동력으로 풀이된다. 이날 BMW와 메르세데스벤츠 등 독일 자동차 회사 CEO들은 중국에 대한 장기 투자를 약속하는 등 더욱 눈길을 끌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수입 자동차에 25% 관세 부과를 발표한 직후인 데다 중국은 여전히 독일 자동차 제조사에 가장 큰 시장이라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