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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표현하면 없어 보이겠지’ ‘
이게 문법적으로 맞나’
‘아 발음 안 좋은 것 티날텐데…’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 영어를 해본 사람들은 누구나 이 같은 감정을 느껴봤을 것이다. 결국 왠만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게 본전이라고 생각해서 입을 닫는 쪽을 택한다. 해외에 가서 원어민을 상대로는 거침없이 날 것의 영어를 하는 사람들도 같은 한국 사람들 앞에서는 틀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상당해 실력 발휘를 못한다. 외국인들은 한국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한다고 생각하고 이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 겸손하게 고개를 젓는 일이 수십년 간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어유치원 졸업생 세대가 사회에 나오면 달라질까. 모국어가 아님에도 영어를 잘 해야 있어 보인다는 단단한 착각이 사회 전체에 내면화되면서 나타난 뿌리 깊은 만성 질환을 이제는 좀 탈피하고 싶어진다.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영어 회화에 대한 아쉬움을 크고 작게 갖고 있는 한국인들의 니즈를 알아채고 글로벌 서비스를 한국 시장에서 처음 시작한 독특한 영어 교육 서비스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틀리면 트인다’라는 신선한 문구를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국민 가수 이효리부터 국민 할머니 ‘밀라논나’의 입에서 나오게 하면서 단단히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2019년 서비스를 공식 시작한 뒤 5년 만에 기업 가치 1조원의 유니콘 반열에 올라선 스픽(Speak)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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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려야 트이는 서비스와 조직 문화
흥미로운 점은 스픽이 추구하는 인재상이 영어를 잘 할 수 있는 속성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비대한 자아를 내려놓고 힘을 빼는 데서 시작한다. 스픽의 인재에게 바라는 핵심 가치는 ‘겸손’이다. 자체적으로는 ‘로우 에고 프로페셔널리즘(Low ego professionalism)’을 가진 인재를 최우선순위로 꼽는다. 최근 출간된 스픽의 성장기를 담은 책 ‘틀려라 트일 것이다’에서 저자 김지안씨는 이를 두고 “자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규정하는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스픽에서는 기존의 학력이나 전문성 등의 후광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오답 노트를 만들어가며 쌓은 진짜 자신감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스픽의 공동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코너 즈윅은 이달 초 투자사인 액셀(Accel)의 벤 쿼조(Ben Quazzo) 파트너와 진행한 대담에서 사람들이 모국어를 제외한 제2언어 학습에 실패하는 이유로 회화를 가장 먼저 하는 게 아니라 가장 나중에 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모국어를 배울 때는 생애 몇 년 간 문법을 생각하지도 않고 자신감 있게 말하고 이후에 학교에 가서 문법을 배우는데 두 번째 언어를 배울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실 환경에서 배우는 언어는 단어와 문법을 먼저 가르친 후 나중에 말하기를 가르쳐요.”
충분히 가감 없이 말해보고 실패할 기회가 없이 모두가 똑같이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잘하려고 하기 때문에 크게 실패한다는 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그가 찾은 문제의식이다. 그는 특히 한국인들 사이에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 유독 강도 높은 강박이 크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를 공략해 한국 시장에 승부를 던졌다. 실제로 스픽을 써보니 실제 문장을 발음하고 나면 AI튜터가 이 단어가 어떻게 들리는지를 이야기해주며 이것을 다르게 발음해 보게끔 유도한다. 이를 테면 기자의 경우 ‘지난(last)’이 계속 ‘rast’나 ‘wast’처럼 들린다고 상기해주면서 올바른 발음 발음법을 이끌어주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교정해주는 튜터가 사람이 아니다 보니 조금 더 편안해지는 점도 있다는 부분이었다. AI는 기자가 영어 교육을 몇 년을 받았든 이를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힘 빼기가 가능한 영역이기도 했다. 사람 튜터에 비해 실망시키기가 덜 두렵다는 점이 작용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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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대한 자아를 가졌나’ 미니 테스트
영어 교육과 팀에서의 성과를 내려면 비대한 자아를 내려놔야 한다는데 그렇다면 비대한 자아를 가졌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를 간단하게 파악해보고 싶다면 질문과 피드백에 대한 나의 자세를 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해보자.
많은 경우 한국 사회에서 질문은 지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는 질문을 던지는 상대와의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에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스픽에서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지안씨가 겪은 과정도 비대한 자아를 내려놓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질문을 지적으로 받아들였던 그는 차츰 질문은 공격이 아니라 긍정적인 호기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스픽에서 질문의 역할은 양질의 의사결정을 위한 자료이자 팀원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고민하게 해 최선의 답을 찾게 하고 결과적으로는 불필요하게 발생할 수많은 커뮤니케이션 비용(세금)을 줄이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질문이나 피드백을 하는 사람과 이를 받는 사람이 상호 간에 안전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사내 전반의 신뢰 문화다.
사실 스픽은 구현하는 제품의 철학과 조직의 철학을 일치시킨 것뿐 ‘비대한 자아’를 경계한 첫 기업은 아니다.
내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 편안해질 것
“자신이 방에 있는 사람 중 가장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편안해지는 게 중요합니다.”
세계 최대 전자 계약 회사인 도큐사인(Docusign)의 전 최고경영자인 댄 스프링거는 이 같이 말했다. 그는 업계에 몸담은 30년 간 사람을 뽑을 때 세 가지를 봤다.
1. 직무에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는가
2. 자신의 자아(Ego)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인가
3. 얼마나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사람인가
두 번째 항목인 자아 관리에 대해서는 이 같은 주석을 덧붙였다. 자신의 성과보다는 팀이 내놓는 성과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인가. 스프링거 전 CEO에 따르면 사람은 갖고 있는 능력치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는데 우리가 얼마나 자아를 통제할 수 있는지와 얼마나 열심히 일할 수 있는가로 성장의 수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조용한 자아(Quiet Ego)’에 대한 논의로 발전해왔다.
브라이언 체스키 에어비앤비 공동창업자 겸 CEO도 창업자가 세세하게 경영 전반의 주도권을 쥐는 ‘창업자 모드(Founder mode)’를 주장하며 회사 전반의 불필요한 계층을 줄일 때도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을 관리자들이 자신보다 능력이 낮은 사람을 채용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메타에서도 최대한 똑똑한 사람을 채용할 것 그렇지 않고 당신이 있는 곳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면 경계할 일이라는 것을 채용 전 교육으로 항상 강조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리더가 만들어주는 신뢰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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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엔비디아에서는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의 가치로 정교화했다. 젠슨 황은 종종 ‘헛소리 말라(No bullshit)’이라는 말로 긴장감을 주고는 하는데 그에 해당되는 금기사항 세 가지는 이렇다.
첫째, 아는 척하는 것
둘째, 얼버무리는 것
셋째, 과장하는 것
젠슨황이 이 같은 헛소리를 필사적으로 경계하는 것은 비대한 자아 때문에 자신의 실수를 일시적으로 감추고 면피하기 위한 행동이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성장 바이블이 된 ‘블리츠스케일링’의 공동 저자인 크리스 예 블리츠스케일링 벤처스 대표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엔비디아표 지적 정직함을 두고 ‘의도된 합리화(Motivated reasoning)’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강조했다. 부서별 이해관계나 자신의 선호, 성향, 선입견으로 인해 판단을 내려야 할 때 자신이 잠재적으로 세운 결론에 부합하는 증거만을 취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역시 비대한 자아에서 비롯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모든 가정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점검하고, 그 결과 검증된 근거만을 바탕으로 결론을 유추하는 자세에는 큰 용기와 겸손이 필요하다는 것. 이를 위해서는 역시나 상호간의 존중과 신뢰 자원이 저변에 깔려 있어야 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래야 실패를 받아들이는 자세도 달라진다. 이를 실행하는 방법은 결국 리더가 실패에 대해 용인하는 태도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
젠슨 황은 한 강연에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에 대한 인내심을 키울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위험 요소를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운 일을 시도할 때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어떻게 빠르게 실패하고, 막다른 길이라면 그 상황을 알자마자 방법을 바꾸도록 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영어 공부든 조직 운영이든 비대한 자아가 득실거리지 않기 위해서는 강력한 신뢰 자본이 먼저 형성돼야 한다는 게 첫 번째 단계라는 점을 되새길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