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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 원 이상을 들여 초대형 인공지능(AI) 인프라를 짓는 정부 사업이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정부와 함께 사업을 이끌겠다고 나서는 기업이 단 한 곳도 없어서다. 정부는 사업자를 다시 찾기로 했지만 당초 참여가 예상됐던 대기업들이 고심 끝에 사업성이 없다고 일제히 판단해 상황 개선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30일 오후 5시까지 ‘국가AI컴퓨팅센터 구축 사업’의 사업 참여 계획서 접수가 단 한 건도 없었다고 밝혔다. 과기정통부는 “공모 결과 응찰한 사업자가 없으므로 이번 공모는 유찰되며 국가계약법을 준용해 다음 달 2일부터 재공고할 계획”이라고 했다. 정부가 AI 3강(G3) 도약을 위해 미국의 ‘스타게이트’ 등에 맞서 주력하고 있는 대형 AI 사업이지만 정작 사업을 맡을 기업을 구하지 못하며 일정 지연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국가AI컴퓨팅센터 구축 사업은 민관 합작으로 그래픽처리장치(GPU) 대형 서버인 국가AI컴퓨팅센터를 지어 국내 기업·기관의 AI 개발과 활용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이를 위해 올해 추가경정예산 1조 4600억 원을 들여 GPU 1만 장을 구매한다. 2030년까지 예산 확대와 정책금융 지원 등을 통해 사업비 최대 2조 5000억 원, GPU 3만 장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과기정통부가 공모를 통해 선정할 ‘국가AI컴퓨팅센터 구축 사업’ 민간 사업자는 정부와 약 2000억 원씩 출자해 지분 절반 가까이를 갖는 특수목적법인(SPC)을 설립하고 GPU 구매와 대여, 데이터센터 구축 등 사업을 공동 진행하는 역할을 맡는다. 당초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KT·LG유플러스, 클라우드 기업인 삼성SDS, LG CNS, 플랫폼 기업인 네이버·카카오 등 AI와 데이터센터 사업 노하우를 갖춘 대기업 중 일부가 이번 사업에 뛰어들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사업성을 갖추기 힘들 것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는 우선 이 사업이 정부 의도대로 공공사업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AI 시대에 접어들며 엔비디아의 GPU 가격이 급등한 상황에서 수만 장을 사들여야 하는 데다 이를 국내 기업·기관에 기존보다 저렴하게 빌려줘야 해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가 SPC 지분 51%를 갖기 때문에 기업이 수익성을 늘리는 방향으로 사업을 주도하기도 힘든 입장이다.
사업자가 자체적으로 운영 중인 AI 데이터센터와 국가AI컴퓨팅센터가 같은 고객사를 두고 서로 경쟁해야 하는 관계라는 인식도 있다. 국가AI컴퓨팅센터를 통해 더 저렴한 GPU 서비스를 내놓는 것이 자체 데이터센터의 고객을 빼앗기거나 가격 경쟁으로 수익성이 낮아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GPU 수요 자체에 대한 우려도 있다. 과기정통부가 국가AI컴퓨팅센터를 비수도권에 지어야 한다는 의무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AI 기업은 수도권에 몰려 있는데 지방에 데이터센터를 건설할 경우 수요를 가져올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고 전했다.
또 정부가 원할 때 정부 측 지분을 사업자가 사들여야 하는 매수청구권(바이백), 아직 제대로 상용화하지 않은 신기술인 국산 신경망처리장치(NPU)도 데이터센터에 탑재해야 한다는 조건 역시 기업들이 참여를 주저한 요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달 3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권 교체와 맞물리면서 기업들이 일단 관망하며 차기 정부의 AI 정책 방향을 확인하고 사업 참여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분위기도 있다.
재공모는 기존 조건 변경 없이 그대로 진행될 예정이어서 같은 결과가 반복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업성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낮기 때문에 정부와의 관계 구축을 위한 대관 목적이 아닌 이상 기업들의 참여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재공고는 신청자가 1곳이라도 있으면 유찰 없이 곧바로 낙찰시키는 방식이라 이번에 적극 검토했던 기업이 도전할 가능성은 있다. 특히 삼성SDS는 삼성전자·네이버·엘리스그룹과 컨소시엄까지 꾸렸던 만큼 유력 후보로 주목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