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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보'를 계기로 살핀 가부키 문화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임병식 순천향대학교 대우교수·국립군산대학교 특임교수

  • 2025-12-02 13:31:08
  • 사외칼럼
영화 '국보'를 계기로 살핀 가부키 문화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아내와 함께 영화 ‘국보’를 봤다. 모처럼 나를 영화관으로 이끈 건 가부키(歌舞伎)라는 독특한 소재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막이 오르자, 수년 전 다녀온 시코쿠가 떠올랐다. 벚꽃 흩날리던 그해 봄날 나는 시코쿠 고토히라의 가나마루 극장에서 가부키 공연을 관람했다. 일정에 없던 방문이었고, 내 인생 첫 가부키였다. 애초에는 고토히라 궁만 들릴 생각이었기에, 현지에 가서야 공연 일정을 확인했다. 15만 원짜리 1등 좌석만 남았다는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잘한 선택이었다. 1835년에 건축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부키 전용 극장에서 전통 가부키를 경험했으니 행운이었다.


그날 공연은 낯설지만 강렬했다. 퀴퀴한 다다미 냄새와 세월이 눌어붙은 나무 기둥으로 구성된 극장은 200년 시간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었다. ‘온나가타(여장 남자 배우)’의 미세한 몸짓과 떨림에 객석은 숨을 죽였다. 그 적막과 긴장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온나가타는 여성을 연기하지만 결코 여성이 될 수 없다. 그 모순은 긴장을 만들고, 긴장은 또다시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 그날 가부키 관람은 일본 전통예술과 장인정신을 깊이 체감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때까지만 해도 가부키는 나에게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였다.


영화 ‘국보’를 보면서 비로소 실마리를 찾았다. 야쿠자 집안에서 태어나 가부키 가문으로 들어간 키쿠오, 명문 가부키 집안의 적자인 슌스케. 두 사람은 피와 재능 사이에서 흔들리고 질투하며 또 서로에게 기대며 성장한다. 무대 위에서는 한 몸처럼 호흡한다. 그러나 막이 내리면 각자 출발선으로 돌아가 갈등한다. 영화는 이들의 몸짓과 표정, 작은 진동까지 정교하게 잡아냈다. 예술영화임에도 상영 3시간 내내 어느 한 군데 걸림 없다. 감독은 군더더기 없는 언어와 탁월한 영상 미학으로 가부키를 재해석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가부키가 이렇게 흥미로운 장르였나’ 하며 감동한다.


영화는 재능은 부족해도 안정적인 금수저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절감하는 흑수저를 대비시킨다. 이는 재일교포 3세인 이상일 감독이 스스로 ‘경계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울림을 준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로 영화를 만들지만, 이름 앞에는 늘 ‘재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는 경계선에 서 있다. 어쩌면 감독은 아직도 혈통과 가문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 자신처럼 경계인이 겪는 소외를 에둘러 말하는지 모른다. 주인공 키쿠오의 절망이 감독의 고백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가부키 역사는 약 400년에 달한다. ‘기울다, 기괴하게 꾸미다’를 뜻하는 ‘카부쿠(傾く)’에서 유래한 가부키는 당시 기준으로 ‘튀는 춤’이었다. 초기에는 여성 배우들이 활동했으나 곧 남성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여장 남성 배우의 연기는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유사 에로티즘으로 연결된다. 가부키가 서민 예술로 자리 잡은 건, 에도 중기 상업·도시 문화가 발달하면서다.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은 가부키를 즐긴다. 연기·무용·노래·악기·무대미술·의상·분장·기계장치가 결합한 종합예술이기 때문이다. 명문 가부키 가문에 각별한 예우를 보내는 것도 장인을 대하는 연장선이다. 전통 가문을 향한 팬심은 K-pop 팬덤과도 닮았다.


무엇보다 가부키는 일본인의 밑바닥 정서를 관통한다. 주군이나 연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이야기, 사무라이 미의식, 전통 의상, 운율 있는 대사는 일본인에게 친숙하다. 최근에는 현대적 재해석과 콘텐츠화를 통해 지평을 넓히고 있다. 젊은 배우들은 영화·드라마·예능·광고에 등장하며 현대적 가부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서울 ‘윤별발레컴퍼니’가 전통 갓을 발레와 결합해 새로운 표현을 만든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해외에서 가부키는 ‘세계에 내놓을 일본 대표 예술’로 평가받고 있다. 가부키와 비슷한 우리 창극도 부활 조짐을 보이고 있으니 다행이다.


우리 창극이 그랬듯 가부키 역시 극장과 배우, 관객 모두 감소 추세에 있다. 대신 색다른 일본문화를 찾는 외국 관광객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도쿄·교토·후쿠오카·오사카·시코쿠 가부키 극장에는 외국인 관객이 꾸준하다. 이들은 가부키를 보면서 일본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인증 샷을 남긴다. 시코쿠 가나마루처럼 극장 투어만 하는 관광객도 상당하다. ‘국보’가 일본 실사 영화 1위에 오른 데는 이런 분위기가 밑바탕 됐고, 열기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영화 성공은 가부키가 한층 대중적이고 생명력 있는 장르로 확장될 가능성을 열어놨다.


영화관을 나서며 시코쿠 가나마루 극장과 우치코 극장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그 공간들이 훗날 일본 실사영화 역대 흥행 1위 기록, 그리고 재일교포 감독의 집요한 시선으로 이어지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가부키는 먼지 쌓인 박제가 아니다. 오랜 세월을 딛고 감성을 흔들며 일본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일본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그들이 집요하게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형식을 이해하는 일지도 모른다. 봄이 오면 다시 시코쿠 가부키 극장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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