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S증권사 VIP 고객인 A씨는 이달 초 자신의 자산관리(WM) 담당자에게 작은 빌딩을 매입하기 위해 맡겨둔 자금 200억원 중 일부를 주식에 투자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그동안 적당한 매물을 찾고 있었지만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라 상업용 부동산의 수익성이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데다 국내외 증시가 폭락한 뒤 단기간에 빠른 반등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S증권사 관계자는 “부동산 자금과 증시 자금의 성격 차가 있지만 최근 일부 고액 자산가들의 증시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진 모습”이라고 말했다.
소액투자자라는 선입견과 달리 최근 ‘억대 매수’ 주문을 넣는 개인 투자자들이 크게 늘고 있다. 부동산 거래절벽이 현실화하고 코로나19 확산으로 전망도 불투명해지면서 증권가에서는 부동산시장의 일부 자금이 증시로 이동하는 조짐이 보인다는 분석도 나온다.
13일 증권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유가증권시장에서 1억원 이상 매수호가를 낸 주문 건수가 34만9,436건으로 지난해 같은 달(9만5,301건)보다 4배 가까이 급증했다. 개인들의 고액투자 경향은 최근 더욱 강화되는 모습이다. 지난해 12월 하루 평균 1억원 이상 매수 주문 건수는 4,800여건이었지만 올해 1월에는 6,000건을 넘어섰고 지난달에는 1만6,000건에 달할 정도다.
대체로 증권가에서는 ‘개인=소액투자자’라는 것이 정설이다. 주식이라는 상품이 원금 손실 가능성이 큰 만큼 채권이나 부동산처럼 고액을 투자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에 개인투자자 입장에서는 큰돈 넣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한금융투자가 올해 1·4분기 비대면 계좌 개설 고객을 분석한 결과 매수금액이 500만원 이하인 경우가 전체의 6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 개인들이 거액을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가 빈번해진 것은 그만큼 증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단기간 급락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전 수준 이상으로 회복할 것이라는, 과거 급락장에서 배운 ‘경험칙’과 국내 증시에 상장된 대형 우량주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믿음이 개인투자자들의 고액 베팅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올해 들어 국내 증시에서 개인들이 순매수한 27조8,000억원어치의 주식 중 삼성전자(005930)(8조2,059억원)와 SK하이닉스(000660)(1조1,477억원) 등 순매수 상위 10개 종목이 14조8,305억원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개인들의 1억원 이상 고액 매수 주문 건수 역시 70% 가까이가 유가증권시장에 집중돼 있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부동산시장이 냉각 중인 만큼 일부 자금이 증시로 넘어올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허재환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부동산시장의 열기가 식기 시작한 후 주식시장으로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며 “반드시 대체관계로 보기는 어렵지만 부동산시장에서 주식시장으로 자금이 유입될 여지도 커졌다”고 설명했다.
원금 손실 가능성도 생각한 증시 자금과 실물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안정적으로 평가받는 부동산시장 자금의 성격은 분명히 다르지만 일부 상품의 경우 ‘교집합’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한 증권사 WM 담당자는 “1억~2억원대 오피스텔 등 수익형 부동산을 찾는 고객 중 일부는 주식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초대형 우량주의 경우 최근 단기 급락으로 추가 하락 위험이 예전보다 줄어든 것도 주식시장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1·4분기 서울 지역 오피스텔 거래 건수는 3,244건으로 지난해 4·4분기보다 20% 가까이 줄었다. 지난해 1·4분기에도 전 분기보다 8%가량 줄기는 했지만 올해는 감소폭이 더 커졌다. 특히 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익형 부동산의 경우 최근 일부 매물은 매매가격이 하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투자처로서의 매력이 줄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하지만 자금 성격이 다른 만큼 본격적인 ‘머니무브’라고 보기에는 시기상조라는 분석이 많다. 김규정 NH투자증권 부동산연구위원은 “아파트 가격이 너무 올라 신규 투자자들의 시장 진입이 어려운 상황인데다 1억~2억원 정도의 수익형 부동산의 경우 증시로 일부 자금이 옮겨갈 가능성도 있다”며 “하지만 집 살 돈으로 주식을 사지 않듯이 자금을 명확하게 분리해 관리하는 초고액 자산가들의 본격적인 이동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성호기자 junpar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