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이 핵심 사업인 반도체에서 위기를 맞으면서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바이오·헬스케어 사업을 집중 육성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삼성그룹 바이오 사업의 씨앗을 뿌린 고한승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이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과 신사업 발굴을 담당하는 미래사업기획단장에 임명됐고 삼성바이오로직스(207940)와 삼성바이오에피스 모두 역대급 실적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이 바이오 사업을 위해 계열사 간 시너지를 강화하는 한편 인수합병(M&A)으로 신약 개발에 본격 뛰어들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4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그룹 정기 임원인사에서 바이오 사업의 그룹 내 위상이 강화된 흔적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13년간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이끌며 ‘삼성그룹 최장수 최고경영자(CEO)’ 타이틀을 보유한 고 사장이 그룹 컨트롤타워 격인 미래사업기획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신호탄이다. 이후 2개 바이오 계열사에서 총 9명의 임원 승진 인사가 이뤄졌고 바이오를 이끌고 있는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는 대외 역량 강화를 위한 첫 홍보 임원이 탄생했다. 기존에 삼성그룹이 전자, 바이오, 금융 계열사 임원인사를 순서대로 진행한 반면 올해는 전자·바이오 인사를 같은 날 발표한 점도 눈에 띈다.
삼성그룹은 그동안 바이오 사업에서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을 이뤘다.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을 담당하는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국내외 고객사에서 총 213건의 프로젝트를 수주해 올 3분기까지 누적 수주 154억 달러(약 22조 원)를 달성했다. 2016년 10조 원에 못 미치던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시가총액은 이날 종가 기준 68조 원으로 약 7배 수준이 됐다. 삼성바이오에피스도 올 3분기 누적 매출 1조 1403억 원으로 역대급 실적을 경신하고 있다. 이미 지난해 연 매출 1조 203억 원을 넘어섰다.
삼성그룹이 그룹의 무게 중심을 점차 바이오에 싣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사업의 방향 전환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CDMO와 삼성바이오에피스의 바이오시밀러 사업은 리스크가 낮고 확실한 ‘캐시카우’ 사업에 가깝다. 업계에서는 삼성그룹이 조만간 현금 창출력을 바탕으로 ‘바이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신약 개발에 뛰어들 것이라 본다. 이미 삼성그룹은 2400억 원 규모의 삼성라이프사이언스펀드를 조성해 바이오 분야 신기술 및 사업 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삼성그룹이 신약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M&A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수차례 신약 개발 의지를 피력한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경우 고객사 수주를 받아 위탁생산하는 특성상 자체 신약을 개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존림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는 최근 “항체약물접합체(ADC) 생산 기술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기반 기술 확보를 위해 국내외 기업과 파트너십 및 M&A를 동시에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신약을 연구개발(R&D)하는 삼성바이오에피스가 국내 바이오 벤처와 접점을 늘려갈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현재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인투셀과 협업해 ADC 신약 개발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바이오 사업의 중심에 삼성물산(028260)이 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삼성물산은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위치한 회사다. 이재용 삼성전자(005930) 회장은 그룹 계열사 중 삼성물산 지분(18.9%)을 가장 많이 보유해 삼성전자와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지배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삼성바이오로직스(43.1%),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삼성바이오에피스(100%)를 자회사로 뒀다. 삼성물산은 라이프사이언스펀드에 약 1500억 원을 투자해 가장 큰 지분을 갖고 있는 주체이기도 하다. 바이오 사업 부문에서 신약 개발에 성공해 삼성물산의 가치가 올라가면 이 회장의 지분 가치 상승으로 직결된다. 삼성그룹 차원에서 바이오 사업을 키울 유인이 크다는 의미다.
고 사장이 계열사 간 업무를 조정하는 미래사업기획단으로 이동한 만큼 그룹 차원에서 바이오·헬스케어 사업 시너지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자 사업에서 기기(세트)와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등 각 계열사가 협업하는 것처럼 그룹에 흩어진 바이오·헬스케어 사업 간 협업 가능성을 모색하는 방식이다.
삼성SDS가 올 7월 국내 최대 바이오 산업 종합 전시회인 ‘바이오플러스인터펙스(BIX)’에 참가한 것이 대표적이다. 바이오 전문 전시회에 처음 참가한 삼성SDS는 의약품 물류 사업을 본격화한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제품별로 보관해야하는 온도와 유통기한이 제각각이고 제품에 맞는 운반 및 보관 시스템이 필요한 의약품 물류 사업에 IT 기술을 접목하겠다는 구상이다. 의료기기 사업을 보유한 삼성전자는 올해 루닛과 인공지능(AI) 솔루션 제품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올해 헬스케어 스마트링인 ‘갤럭시링’을 출시했고 의료용 보행 보조 로봇 등도 개발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