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정국에 국정 리더십이 약해지면서 인공지능(AI) 시대 국가 인프라인 전력망 구축과 반도체·소형모듈원전(SMR) 지원 같은 굵직한 정부 사업들이 좌초 위기에 놓였다. 전문가들은 이들 사업은 여야 정치 성향을 떠나 미래 먹거리 확보와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필수적 분야인 만큼 정책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게 정치권이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국회와 정부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각 부처가 추진해온 핵심 사업들의 추진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에서 해오던 것 중에 방향이 옳은 것도 많았는데 사실상 올스톱됐다고 봐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며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각국이 첨단산업에서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우리만 뒤처질 수 있어 걱정”이라고 전했다.
정부 안팎에서는 △반도체·AI 지원 △전력망 구축 △저출생·고령화 후속 대책 △원전 수출 확대 △경제 활력을 위한 상속증여세 완화 △수도권 주택 공급 등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첫 시추 사업 예산(497억 원)이 전액 삭감된 ‘대왕고래 프로젝트’만 해도 자원 개발과 에너지원 다양화라는 측면에서 정책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규 원전 건설을 포함한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확정과 쌀 산업 구조 개혁, 일·가정 양립 정책 등도 마찬가지다. 주택 공급 같은 사업은 시기를 한 번 놓치면 대가가 크다는 얘기가 있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반도체만 봐도 전 세계 국가 대항전”이라며 “야당이 기업들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기업가정신이 추락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시장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참사를 되새겨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도 정책의 연속성은 지켜나가야 한다는 조언이 제기된다. 무디스·스탠더드앤드푸어스(S&P)·피치 등 국제 신용평가기관들도 국가의 신용등급을 평가할 때 정책 일관성을 주요 평가 요소로 고려한다. 조영무 LG경영연구원 연구위원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는 대외 신인도 관리가 가장 중요하다”며 “미래 먹거리와 첨단산업 등의 지원 사업에 대해서는 외국인 시각에서 볼 때 정책 공백으로 비치지 않게 정치권이 협력해 정부를 지원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헌법재판소 판결까지 정치적 불확실성이 상존한다”고 밝혔다. 영국계 투자은행(IB)인 바클레이스는 한국은행이 15일 ‘경제정책에서 여야 및 정부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점을 들어 “한은이 내수의 추가 하방 위험을 경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외국계 금융기관들의 이 같은 시각은 ‘탄핵 정국과 상관없이 정책 일관성을 유지해야 대외 신인도에도 타격이 없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해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정치 일정은 정치 일정대로 추진하고 경제정책은 연속성을 유지하겠다는 점을 보여줘야 대외 신인도 측면에서도 긍정적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염명배 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도 “정책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외부에 보인다면 우리 정책 운용 측면에서도 도움이 안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정치적 이슈와 무관한 산업·민생 정책은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반도체 산업 육성이 대표적이다. 당초 국회와 정부는 반도체특별법 제정과 반도체 세액공제 확대,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인프라 지원 강화를 추진했지만 비상계엄·탄핵 사태가 겹치면서 논의가 사실상 중단됐다.
대형마트의 온라인 배송 규제 완화와 의무휴업일 지정 원칙 삭제를 뼈대로 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도 국회에 계류돼 있다. 저출생·고령화 대응을 위한 인구전략기획부 설치 역시 불투명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재건축·재개발 특례법처럼 주택 공급을 촉진할 법안도 언제 국회를 통과할지 불확실하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에너지·환경 정책도 마찬가지다. 한국석유공사의 동해가스전 활용 이산화탄소 포집·저장(CCS) 사업은 올해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가 물 건너가면서 내년 착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환경부가 이상 폭우·가뭄에 대응하기 위해 지으려는 14개 기후 대응댐 역시 백지화될 가능성에 힘이 실린다. 야권과 진보 성향 단체에서 환경 파괴, 주민 소통 부족을 이유로 기후 대응댐 건설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력망 인허가 절차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전력망특별법 제정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세제개편도 사정은 비슷하다. 세법 전문가 사이에서는 상속·증여세 개편과 종합부동산세 폐지와 같은 세제 개혁 작업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세제개편안을 먼저 꺼낸 곳이 대통령실과 정부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은 6월 “상속세 최고세율을 30%까지 낮춰야 한다”는 입장을 내면서 상증세법 개정에 불을 붙인 바 있다.
거꾸로 보면 야당 입장에서는 이 같은 세법 개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오문성 한양여대 세무회계학과 교수는 “사실 올해 상속·종부세와 같은 각종 세제 이슈에 대한 논의가 많이 무르익었던 상황”이라며 “최근 정치 상황으로 관련 논의가 올스톱돼 아쉽다”고 짚었다.
연장선에서 탄핵 정국 당시 성급하게 마무리했던 예산안·세법개정안도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여야는 이번에 세법개정안에 부대 의견을 담지 못했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산하 조세소위원회에서 유턴 기업 지원 방안, 공공임대주택의 종부세 과세표준 합산 대상 제외와 같은 안건을 담아 정부에 부대 의견으로 내려고 했다. 하지만 야당의 단독 감액 예산안 제출로 관련 논의가 중단되면서 이 같은 부대 의견 제출은 사실상 무산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 정부가 추진하던 규제 완화 기조도 차질을 빚게 됐다는 해석도 있다. 국무총리실에 따르면 정부는 현재 규제 혁신을 위해 총 342개 법안의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이 중 22대 국회에 발의된 법안은 203개지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은 총 38개에 불과하다.
정부는 규제 개선과 민생 법안 처리를 차질 없이 수행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얼마나 추동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에 신산업·민생 관련 규제 개선 방침을 담을지 검토하고 있다”며 “내년에도 차질 없이 규제 개선 과제를 발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국회도 경제 관련 논의를 정상화해 정부와 협업에 나서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 교수는 “반도체 지원 같은 성장 지원 법안에 대해서는 국회에서 포용적인 스탠스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